호수같이 잔잔한 일상

늘 감사하고 가끔은 아쉬운 날들

by 문인선
든든한 당신, 호수처럼 평화로운 일상 201811



스무 살이 넘어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던 것은
글을 전공으로 공부했기 때문이었던 것도 같다.
전까지는 되는대로 썼다.
쓰고 싶은 대로, 내 깜냥만큼.
그리고 만족했다.
나는 최대한 감정에 솔직했고,
다 써서 털어 버리고 나면 마음이 개운했다.
그런데 글에 대한 평가를 배우고,
내 글에도 평가를 하게 되니
더는 만족스럽지가 않았다.
몰래 지켜보는 한 살 많은 선배에 대한 마음을 잔뜩 쓰고 나면
이전 같으면 시원하고 개운 했을 텐데
유치하게 느껴졌다.
친구가 좋아하는 남자를 같이 좋아하는 비밀스러운 기분도 쓰고 싶은데,
적고 나면 영 우스웠다.
마음이 다 털어지지 못하고
변비처럼 쌓여가거나
토끼똥처럼 조금씩만 새어 나왔다.

유치하고 우스운 마음, 비밀을 티 내고 싶었다.
그래서 그땐 거북이를 많이 그렸다.
느리지만 토끼를 제치고 이기고 싶은 마음,
내 속도와 재능을 나무라고 싶지 않아서
거북이처럼 남들 보기엔 느려도 꾸준히 가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혼자 웅크리고 앉아 꽃을 보는 아이를,
가만히 고개를 넘겨 하늘을 보는 아이를,
누군가의 뒤에 서서 따라 걷는 모습을,
어깨가 커다란 남자의 뒷모습을
반복하여 자주 그렸었다.

이제는 다른 그림을 그린다.
하얀 머리의 할머니를 그리고,
양복을 입은 아저씨를 그린다.
술에 취한 나를 그리고,
수영장 안의 나를 그린다.
내 옆엔 항상 나보다 좀 더 크게 조르바를 든든하게 그려 넣는다.

어느 날은 문득
그리고 싶어 스케치북을 폈는데
아무것도 그릴 수 없어 도로 스케치북을 닫기도 한다.

글도 그림도
외로운 마음이,
비밀이 생겼을 때
더 많이 찾게 되는데.

호수같이 잔잔한 일상이
늘 감사하고
가끔은 아쉬운 날들.

오늘처럼
비가 적게 내리고 바람이 적당히 부는 날,
한참을 걷다 들어가게 되는 이런 날씨에는
조금 아쉬운 그런
일상.

#mooninsun
201905 옛날 그림
#그리고요가하는일상 #꾸준한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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