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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산균 Sep 29. 2021

오후 3시의 파리 놀이터

놀이터수다 문화에관하여

유학 초창기에 친하게 왕래하던 8년 차 유학생 선배가 이런 간증(?)을 한 적이 있다. 혼자 타지에서 공부하며 지내는 외로운 시기에 위기가 왔는데, 반려견을 입양하게 되면서 정말 삶이 180도 달라졌다는 것이다. 반려견을 돌보며 오히려 생활에 활력이 생기고 몇 년간 한 건물에 살았지만 전혀 왕래가 없었던 이웃들과 개를 매개로 서로의 안부를 묻고 서로를 돌봐주는 사이가 되었단다. 낯선 이들과 도 그가 개를 산책시키는 중이라면 경계 심 없이 대화하게 되었다고도 했다. 


김이 나에게 "유모차를 끌고 동네를 걸어 다니니  내가 이 사회에 소속된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라고 말했을 때, 나는 그 선배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김은 가족이라는 안정적인 바운더리와 소속감을 중요시하는 사람이니까..라고 생각했었는데, 아이와 동네를 산책하면서 예기치 않게 다양한 사람들과 대화할 일이 많아지면서 나도 그의 말을 공감하게 되었다. 어떤 사회에 살아간다는 것은 단지 같은 공간에 존재한다는 것이 아님을 아이를 키우며 느낀다. 그전에 프랑스는 나에게 대상화된 공간이었다면, 이레와 함께 파리는 비로소 생활공간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의 생활공간의 팔 할을 차지하는 중요한 곳은 동네 놀이터다. 


마치 견주들이 모여 서로의 개의 안부를 묻고 그러다 친해져 티타임을 갖는 것처럼, 파리에는 놀이터 수다 문화가 있다. 한국의 키즈카페나 문화센터는 없지만, 대신 '여전히' 놀이터가 있다. 어렸을 때, 학교 끝나고 동네 친구들과 모여서 "밥 먹어라" 소리가 하나 둘 들릴 때까지 논 기억은 있지만, 걷기도 전부터 놀이터를 갔던 기억은 없다. 그런데 이곳의 놀이터에선, 특히 아이를 낳은 지 얼마 안 된 젊은 부부들이 많은 이 동네의 놀이터 에선 아장아장 걷기 시작하는 애들은 물론 자기 몸도 가누기 힘든 쪼꼬미들까지 모두 뒤섞여 논다. 아마도 파리의 집들이 좁고 답답하기도 하고, 비 오는 날에도 테라스를 사수하는 파리인들만의 생활습관인지도 모르겠다.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은 같은 연령대들이 좋아할 만한 같은 놀이기구로 향하게 되고, 자연스레 그 주변을 부모들이 지키고 있다. 모르는 사람끼리도 자연스럽게 인사를 하거나 정류장이나 상점에서 잠깐의 수다를 나누는 문화는 우리에게도 이미 잘 알려진 프랑스의 문화인데, 이 문화는 놀이터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아이들끼리 좁은 반경에 모이면 부모들의 대화가 자연스럽게 시작된다. 아이의 이름과 나이, 하루 일과부터 시작되는 수다는 동네 정보와 부모들 자신의 이야기까지 뻗어간다. 파리 사람들 특유의 안전거리를 유지하지만, 여러 번 만나 대화가 잘 통하는 이들과는 친구가 되기도 한다. 우리도 그렇게 동네에서 친구들을 사귀고, 아이들끼리 어울리며 새로운 생활권을 갖게 되었다. 이렇게 로컬 피플이 되어간다. 


이게 파리 혹은 프랑스의 문화라는 건 몇 번의 여행을 거쳐 알게 되었다. 독일이나 벨기에에 사는 친구들을 방문하며 종종 시간을 보냈던 놀이터 혹은 공원에서는 아이를 보며 미소를 날리거나 배려를 받은 적은 종종 있지만 모르는 사람과 아이를 매개로 수다를 떠는 모습을 경험해보지 못했다.  


주말, 점심 먹고 낮잠 잔 이후 시간인 오후 3시는 누가 뭐래도 놀이터의 시간이다. 에너지 충만한 개를 하루에 두세 번 산책시켜야 하는 의무를 지닌 견주들처럼, 우리는 미리 약속하지 않아도 놀이터에 오후 3시 언저리의 시간에 모여 아이들의 에너지를 방출한다. 때로는 육아의 팁을 나누기도 하고, 수다 세러피를 통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도 한다. 최근에 멀리 이사를 간 친구들이 동네 놀이터가 너무 그립다며 안부를 물어오길래, 그 동네 놀이터가 편해지면 새 동네에 안착한 것으로 생각할게라고 답해주었다. 



오후 3시의 파리 놀이터는 시골의 마을회관이다. 

오후 1시에 가면 아마 놀이터엔 아무도 없을 거다. 그들은 아직 낮잠을 자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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