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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산균 Sep 29. 2021

출산 교육 단상

임신 기간 중에 특별한 질환이 없는 한, 산부인과에 자주 방문하지는 않는다. 초음파도 초, 중, 말기 딱 세 번으로 끝내고, 4개월 차부터 한 달에 한번 정도 사쥬 팜을 만나는 약속도 한 번쯤은 스킵해도 된다. 임신은 특별한 조치가 필요한 질병이 아니니까. 


썰렁한 산부인과 병동의 안내판에는 '임산부의 흡연 관리'나 '백신 안내' 따위의 캠페인 공익광고가 대부분이다. 구석에 '예비 부모를 위한 출산교육'이 보인다. 병원에서 주최하는 출산 교육에 참석하는 예비 부모들이라면 거의 첫 출산인 경우다. 나도 둘째를 출산할 때는 출산 전 준비라는 것을 거의 하지 않았다. 병원 담당 사쥬 팜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할 정도였으니. 나를 포함, 출산 교육에 참석한 호기심 반 두려움 반의 만삭 예비 엄마와 아빠는 출산교육을 담당하는 사쥬 팜이 내뱉는 문장 사이로 사소하거나 중요한 질문들을 쏟아낸다.


진통 시 대처 방법부터 병원에 오면 어떤 과정으로 출산과 입원 퇴원이 이루 어지, 아기 방에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와 행정적 절차들까지 생전 처음 들어보는 주제다. 자세하게 설명된 교육용 책자도 있지만 일단 열심히 메모해 둔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산부인과용 불어 단어들을 정리해 놓은 수첩의 한편에 말이다. 애 낳는 중요한 순간에 불어 못 알아듣는 거 아냐? 하는 시답잖은 걱정도 스멀스멀 올라온다. 

 

예비 부모들에게 출산 교육을 하는 그녀는 빠르고 불분명한 발음과 젊은 파리지엔 특유의 억양과 속도를 자랑했다. 고객을 대하는 따뜻한 미소 따윈 짓지 않는다. 어리바리한 초보 부모들을 위한 자세한 설명 따윈 생략한다. 아마 수십 번 아니 수백 번을 했을 법한, 매뉴얼 대로의 그 출산 교육을 반복하면서 안 그래도 사무적인 말투에 기계적인 태도가 더해졌으리라 이해해본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육아용품에 관한 한, 세상의 모든 마케팅에 저항하겠다는 의지만큼은 게을러지지 않았나 보다. 이런저런 육아용품의 쓰임새와 필요를 묻는 질문에는 단호하고 분명하게, 혹은 친절하리만치 자세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아기의 사진을 레이블에 넣은 에비앙의 마케팅 지적했고, 모유가 아니면 죄책감을 선물하는 모유 관련 용품 시장의 상술에 대해서도 이 물건이 없으면 발달에 문제가 생길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주는 광고들에 대해서도 꼭꼭 코멘트를 달았다. 비싼 브랜드의 목욕 제품은 포장과 향에 많은 돈을 들이고 불필요한 첨가물들이 들어있으니 포장에 속지 말라고도 알려주었다. 


아기가 태어나서 몇 주 동안엔 침대 말고 꼭 있어야 되는 용품은 없다는 둥, 아이들마다 특성이 다르니 너무 조급한 마음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할 때는 말투와는 달리 인자한 마음씨를 지닌 현자의 태도 같았다. 

'그거 아무 소용없는 거 아시죠? 뭐, 하긴 엄마의 선택이니까 원하시면 사셔도 되긴 하죠.'란 문장도 잊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필수 육아용품에서 필수는 없다는 것이 이 출산교육의 교훈이었달까. 


그럼에도 가끔은 생명 자체를 돌보는 일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앗아가는 물건 채우기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린다. 필요한 것을 잘 갖추고 있다는 뿌듯함을 느끼려는 순간 뒷골이 오싹해지며 뭔가 섬뜩하다. 앞으로의 장기 레이스에서도 이런 파도타기의 순간이 몇 번이나 찾아올까.  부족의 죄책감이나 만족의 자아도취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즐겁게 자족을 누리는 방법이 부모가 되는 과정인 거 같다. 


(2015년 9월 9일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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