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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공 많은 배가 도달한 곳

갈등과 웃음 사이, 우리만의 항로로

by 미지의 세계

남편은 종종 혼자서 두 아이를 돌본다. 아이들이 어린이집을 하원하고 오면 집 앞에 학교 운동장에서 1시간가량 더 놀고 오거나, 아이들과 본인만 시댁에 가기도 한다. 툭하면 자꾸 애들은 자기가 볼 테니 엄마인 나는 빠지라고 한다. 요즘 말로 '독점 육아'(아이들을 독점해서 돌보는 육아)를 사서 한다.


여기까지 보면 사랑꾼인가 싶지만, 사실 남편은 아내인 나를 위해 그런 선택을 한 게 아니다. 단지 육아를 혼자 하는 게 훨씬 편하단다. 자기 나름대로 잘하고 있는데 공동 양육자의 잔소리를 듣는 게 더 스트레스라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먼저 혼자 아이들을 돌보고 나면 나중엔 홀로 자유를 누릴 날도 있지 않겠냐고 한다. 그런 이야길 하면서 눈을 찡긋 거리길래 못 본 척하며 지나갔다. 사실 나는 양육자가 많을수록 아이들에게 훨씬 안정적이고 좋은 분위기를 조성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돌봄의 섬세함도 달라지고 말이다. 해서 온 가족이 다 함께 있는 걸 더 좋아한다. 남편이 쉬라고 하니까 쉬기는 하지만 가방을 챙겨 언제든 함께 나설 준비를 하는 이유다.



그래도 그의 정성은 마침내 반대편에 가 닿았다. 남편이 명절 기간을 절반씩 나눠서 육아와 휴식을 번갈아가며 하자고 제안했는데 내가 받아준 것이다. 예를 들어 명절이 4일이면 이틀은 남편이 아이들과 시댁에, 이틀은 내가 친정으로 아이와 함께 가는 식이다. 물론 처음에 나는 아이들 뿐 아니라 우리도 양가 부모님께 인사드릴 도리가 있는 거라며 살짝 우려를 표현했다. 그랬더니 그럼 아이들을 양도(?)하면서 각자 집에서 식사 한 끼씩만 간단히 하자고 했다.


양가 부모님은 거의 대부분 별 말없이 우리를 믿고 지지해주신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지난해의 설날과 추석 때 명절을 따로 보냈다. 홀로 아이 둘을 보는 건 역시나 힘들었지만 한편으론 시댁에 가서 요리하고 자는, 소위 며느리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어 편했다. 남편은 자유의 기간 동안 홀로 제주도 올레길을 걸었다. 가끔 영상통화를 걸어보면 표정이 더없이 편안해 보였다. 아이들을 앞으로 어떻게 키우면 좋을지 아이디어도 샘솟는 모양이었다. 잠정 휴업상태인 우리 메신저로 계속 육아에 대한 생각과 의견을 보내왔다. 아이들은 가끔 아빠나 엄마를 보고 싶어 했지만,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별 탈 없이 지냈다. 그 명절을 시작으로 한 달에 한번, 혹은 주말 반나절 동안 부부 중 한 사람이 자유의 시간을 갖는 날이 많아졌다. 아이들 역시 "아빠 여행 갔어요?" , "오늘은 엄마랑 노는 날이에요?" 하며 금방 적응했다.



아예 홀로 아이들을 보는 건 최근의 일이고 조금 극단적인 사례지만, 서로가 역할을 분담하고 최대한 터치하지 않는 방식을 택한 건 근 3년 가까이 부부가 함께 육아휴직을 하며 쌓인 노하우이기도 했다. 거의 매일을 붙어살면서 육아하니 특히 초반에는 엄청 다퉜다. 혼자 하면 빠르고 간단할 일을 서로 상의해야 해서 힘들었다. 서로 거리가 좀 필요했지만 그러기엔 매일 붙어있었고 함께 해야 할 일도 많았다. 평생 이렇게 산다니 암담해서 결혼이 성급했다는 생각도 종종 했다.


그즈음 부부 둘이서 육아 휴직을 함께 하는 우리에게 질문도 많았다. "부부가 함께 육아하면 어때, 좋아?" 그러면 나는 늘 시니컬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냥 배우자가 나가서 돈을 벌어오고, 내가 혼자 육아를 하는 게 낫겠어." 아마 남편도 비슷하게 말하고 다녔을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뭐가 그렇게 힘들어서 싸웠는가. 가볍게 보면 사소한, 하지만 당시에는 그게 아이들의 건강에 직결되는 것 같은 일들이 주요 소재였다. 둘째가 아직 뱃속에 있었을 시절, 첫째 아이는 베란다 쪽에 서서 주차장에 있는 자동차를 구경하는 걸 좋아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시기가 겨울이었다는 점이다. 아이가 얇은 내복 차림으로 나가려고 하면 나는 뭐라도 껴 입히고 내보내기 위해 아이를 막아섰다. 한참 실랑이를 하고 있자면 아이는 떼쓰고 울었고, 배우자는 '극성 엄마가 아이를 울린다'며 비판했다. 남편은 잠깐 내복을 입고 나가있는다고 해서 감기에 걸리는 건 아니기 때문에 아이가 하고 싶은 대로 두는 게 낫다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아이들에게 밥 먹이는 문제도 있었다. 남편은 먹는 걸로 아이들에게 사정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있다. 먹을 게 넘쳐나는 요즘 세상에 밥 한 끼 굶는다고 별 일이 일어나지 않으며, 배가 고프면 아이가 알아서 밥을 찾아먹을 거라는 이야기였다. 반면 엄마 입장에서는 한창 성장기인 아이들이 밥을 안 먹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컸다. 그렇다 보니 내가 숟가락을 들고 아이 앞에서 설득하고 있다가 남편의 제지로 물러나는 경우가 많았다.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대화를 많이 했지만 쉽게 타협점을 찾지 못했다. 결국 서로 알아서 할 테니 당신은 신경을 끄라고 소리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대로 매일 싸우며 살 순 없었다. 그래서 처음엔 더 예민하게 각자의 역할에 예민하게 선 긋는 방식을 택했다. 육아 관련된 세부 사항을 정리해 나누고 서로 간섭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아이들의 옷차림에 더 예민한 내가 스톱을 외치면, 남편은 잠시 멈춰서 내가 아이들의 외투를 다 입힐 때까지 기다렸다. 반면 아이가 밥투정을 해서 남편이 내게 눈치를 주면, 나는 안방으로 들어가고 남편이 아이와 실랑이를 벌였다. 그 결과는 우리만의 공유 게시판에 따로 정리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것 역시 아주 좋은 해결은 아니었다. 아이들을 챙기는 일들은 너무 세세하고 다양해서 각자 담당을 나누는 게 어려워진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을 돌보는 것은 예측 불가능한 일들의 연속이었다. 한마디로 엄마가 아이들 밥을 먹일 때도 있고, 아빠가 아이들 옷을 챙겨야 할 때도 생기게 된 것이다. 이내 각자 역할은 흐려졌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가끔은 대화가 엉뚱하게 튀어 오랜 기간 다툼과 침묵으로 이어질 때도 있었다. 아이들을 잘 키워보겠다고 시작한 일이지만 여전히 너무 피곤했다. 아이들을 돌보는 얼굴에 웃음이 사라졌다.



여러 번의 침묵 끝에 우리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 각자 주장은 하되 대부분은 그냥 좋게 넘어가는 게 낫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어려운 이야기도 아니었다. 사회생활을 할 때도 불편한 모든 걸 콕 짚어내기보다 가끔은 그냥 한숨 한 번 쉬고 지나가는 편이 덜 힘든 경우가 많다. 둘의 뜻이 오래간만에 통한 뒤로 우리는 이제 이런 말을 입에 달고 살기 시작했다. "대세에 지장 없잖아. 넘어 가"


여기서 대세는 당연히, 아이들의 행복한 성장이었다. 그제야 싸움이 잦아들었다. 사실 아이들이 크면서 우리의 치열했던 지나날이 별 의미 없게 되는 경우도 많아지던 시점이었다. 부모가 뭐라고 합의했건 간에 아이가 철 지난 옷을 입고 나가겠다고 고집을 부리거나 밥을 내놓으라고 재촉하는 날도 생기게 된 것이다. 그래서 절대 변하지 않는 것, 즉 '우리 가족의 행복을 위해 상대 배우자도 노력하고 있다는 믿음'과 '번거로운 일을 내가 더 하면, 다음은 상대가 나를 배려해 줄 거라는 믿음'을 유일한 기준으로 삼고 육아의 미세한 공백을 메워가기 시작했다. 그제야 아이들의 애교에 웃을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사공이 많은 배는 결국 어디로 갈까. 오랜 격언에 따르면 배는 아마 산으로 갈 거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산으로 떠나는 배는 시도 자체로 이미 용감하다. 실제로 실현되면 그건 대박이다. 새롭고 독자적인 항로를 개척해 낸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대로 나름의 방식을 찾고 있다. '아이들의 성장과 행복에 방해되지 않는 한은 각자의 육아 스타일을 존중할 것', '돌봄의 톤을 유지하기 위해 대화가 필요하다면 최대한 서로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 합의를 찾아나갈 것' 등이 그 예이다. 육아는 여전히 조금 고단하고, 부부 사이에도 갈등이 종종 생기지만 그래도 함께 해본 덕에 서로의 어려움과 마음을 알 수 있다. 함께 지나온 과정을 믿고 뱃머리의 방향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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