밈에 휩쓸리지 않고
어느 날 첫째가 한껏 장난스럽게 얼굴을 구기며 말했다. "토미, 토미~ 흐흐흐!" 어느 유튜브 채널의 시작음이다. 아이 얼굴에서 시작된 미소가 우리 부부의 얼굴에도 퍼진다. 이내 아이는 이후 이야기와 노래까지 흥얼거린다. 우리도 다 아는 내용들이다.
동화, 동요 등을 유튜브로 들려주고 함께 듣다 보니 유명 채널의 이름과 캐릭터들은 자연스럽게 알게 됐다. 타요와 친구들, 슈퍼윙스 호기, 베이비 버스.... 아, 세상에 이렇게 많은 캐릭터가 있는 줄 이전엔 전혀 몰랐다. 그리고 내가 그의 이름과 생김새, 성격, 주인공의 친구들까지 다 알게 될 줄은 더더욱 몰랐다.
캐릭터뿐만이 아니다. 최근까지 엄청난 인기였던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주변 어린이들을 모두 다 주인공 루미로 만들었다. 지인의 딸내미는 메인 OST인 골든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황금빛 보자기를 목에 두르고 하루에도 몇 번씩 공연을 한단다. 짧은 영상들의 배경음으로 유행을 타는 소위 '밈' 음악들도 있다. "괜찮아, 링딩 딩딩딩~"하는 노래에 맞춰 우리 아이들은 신나게 춤을 춘다.
아이들을 보며 새삼 인터넷과 콘텐츠의 위력을 실감한다. 만 1살도 요즘 유행하는 밈을 안다. 부모가 아이들에게 알려주든, 자기가 보든, 어린이집에서 친구들에게 배우든 해서 유행하는 모든 음악과 춤이 단 며칠 안에 아이들에게 온다. 이런 흐름을 비판하고 싶진 않다. 사실 오히려 고맙다. 아이들의 귀여움이 배가 되기 때문이다. 아이가 음악에 맞춰 기저귀 찬 엉덩이를 흔들고 있는데 뭐가 문제일까? 그저 빨리 그 애를 안아올리고 뽀뽀를 마구 해줘야 할 뿐이다.
다만 만 한 살한테까지 영향을 미치는 콘텐츠가 있다는 건 좀 두렵기도 하다. 그게 만약 폭력적이거나 좋지 않은 콘텐츠라면 어쩔까 하는 불안 때문이다. 하루는 동네 초등학교를 지나는데 학생들이 <오징어 게임> 얘기를 하며 지나가는 것이다. <오징어 게임>은 19세 이상 관람가인데 어떻게 봤을까 싶었다. 인터넷으로 검색을 좀 해보니 영상을 직접 봤다기 보단 콘셉트만 차용해 만든 2차 가공 콘텐츠를 봤을 가능성이 큰 것 같았다. 예를 들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은 게임 영상 속에 <오징어 게임> 테마의 공간이 있다거나 하는 식이다.
그런데, 직접 접한 게 아닐지라도 혹시나 아이들이 원래 콘텐츠에 있는 어두운 서사까지 너무 자연스럽게 흡수할까 봐 걱정이 된다는 거다. 당연히 과한 걱정이겠지만, 아이들의 습득력을 알고 있는 부모 입장에서는 자꾸만 그렇게 확대 해석한다. 설령 정말 그렇대도 부모가 뭘 할 수 있는 건 딱히 없기 때문에 그저 나중에 애들이 자기만의 올바른 주관으로 콘텐츠를 소비하도록 도와주고 지켜줘야겠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도 오랜 공을 들여야 가능한 일일 테지만.
그래도 콘텐츠가 쉽게 유통되는 것의 순기능이랄까, 장점도 있다. 세대를 넘나들며 함께 뭔가를 쉽게 공유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전에 로제 노래인 <APT.>가 인기여서 우리 아이들도(거듭 말하지만 만 1살과 만 3살짜리도) 후렴 부분을 거의 매일 부르고 다녔다.
아이들만 좋아했다면 그렇게 대 히트곡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강렬한 박자와 리듬감에 나는 거의 광적으로 빠져있던 수준이었다. 해서 우리 가족은 저녁에 한동안 <APT.>를 계속 틀어놓고 다 같이 춤을 췄다. 공식 안무는 아니지만 팔도 둥글둥글 굴리며 펄쩍펄쩍 뛰었다. 정말 웃기고 재미있었다.
시댁에서는 식사를 하고 나서 시부모님 앞에서 아이들의 재롱잔치를 선보일 때가 종종 있는데 마침 그날은 로제의 <APT.>와 윤수일 <아파트>를 섞어놓은 노래가 있었다. 그걸 틀어놓고 아이들을 춤추게 했더니 시부모님도 더욱 크게 박수를 치며 좋아하셨다. 모두가 아는 노래라 더 신났을 것이다.
그거 말고도 아이들은 자기 아빠가 좋아하는 옛날 노래, 이를테면 <쓰러집니다>나 <안동역에서>같은 노래도 다 알고 김건모 <핑계>를 흥얼거리며 걷는다. 이건 어린이집 선생님이 "어머님, 혹시 ㅇㅇㅇ가 <핑계>를 부르는 걸까요?" 하며 제보해 주신 덕분에 알았다. 이처럼 우리 가족은 종종 콘텐츠를 매개로 부모의 어린 시절 이야기도 하고, 같이 즐거운 시간도 보낸다. 아마 인터넷이 존재하는 한 아이들도 먼 훗날 자기 아기들과 어린 시절을 같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침투력 좋은 밈과 각종 콘텐츠들이 고맙기도 하다.
얼마 전 별 일 아닌 걸로 기분이 좋지 않았던 날, 남편을 붙들고 근심 어린 표정으로 "나 어떻게 해야 하지?"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둘째가 "괜찮아, 링딩 딩딩딩~"하며 춤을 추는 것이다. 이게 뭔 시트콤 같은 상황인지. 잠깐 정적이 찾아왔지만 이내 다 같이 웃으며 분위기가 풀어졌다. 둘째랑 그 노래를 하며 논 게 까마득히 오래전인데 아직도 그걸 기억하고 있는 게 신기했다.
그리고 그냥 괜찮다고 해도 되는데, 음악과 결합된 밈을 먼저 떠올려서 노래를 부른게 계속 마음에 걸렸다. 어디선가 '요즘 사람들은 어휘력이 늘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밈으로만 대화한다'는 내용을 보고 뜨끔했던 기억 때문이다. 그러니까, 엄마인 나 자체가 밈이나 유행어에 길들여져서 '보법이 다르다'는 둥 그럴듯한 인터넷 식 표현으로만 대화를 하는데 그게 아이들에게도 생각보다 큰 영향을 줄수도 있겠다고 느꼈다.
뜨끔했던 이후로는 인터넷에서 사용하는 표현을 적게 사용하고, 독서 같은 걸로 언어 습관을 다듬으려고 노력한다. 아직 뚜렷한 성과는 없지만, 아이들 입에서 좀 더 다양하고 정돈된 말이 많이 나올 때까지 계속해 볼 생각이다.
음. 그냥 아파트, 아파트 하며 신나게 노래 부르고, 링딩딩 하며 춤추는 게 다인데 생각이 자꾸 멀리, 깊게 뻗는다. 나한테만 영향을 준다면 사실 아무것도 아닐 일인데. 끽해야 유행가를 부르고 인터넷 밈을 다 외워 말하는 철부지 어른이 될 뿐인데 말이다. 아이들이 자칫 유행하는 콘텐츠 때문에 어떤 영향이라도 받을까봐 전전긍긍하게 되나보다. 그러다 또 아이들이 춤추고 노래하는 모습에 웃게 되니 이것 참 알 수가 없다. 부모라서 겪게 되는 고민과 행복이라고 볼 수밖에. 다만 유행과 즐거움, 그 사이에서 중심을 잡아주는 것이 곧 부모의 몫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