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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급 레인의 무게

새로운 물결을 대하는 자세

by 미지의 세계

수영을 배운 지 꼭 1년째 되는 날, 드디어 상급반으로 올라갔다. 그래봤자 바로 옆 레인으로 옮겨간 거지만 기분이 남달랐다. 상급반은 마스터반이 없는 우리 수영장에선 가장 높은 반이기 때문이다. 옆 레인으로 넘어가기 위해 잠깐 숨을 참고 물 밑으로 퐁 들어갔다가 나오니 선배 언니들이 박수를 쳐 주었다.


"드디어 왔구나. 축하해~ 우리 재미있게 해 보자."


북적북적해진 상급반 레인에서 다 같이 25m를 돌기로 했다. 중급반에서 같이 올라온 사람들과 행렬의 맨 마지막에 섰다.


딴생각이 든 건 두 바퀴째 돌 때였다. 강습을 받으면 늘 1번으로 앞장서서 몰랐는데 뒤쪽에서 수영하니 신경 쓸 게 많았다. 일단 너무 서둘러서 앞사람의 발에 손이 닿지 않게 해야 했다. 또 너무 뒤처지면 뒷사람에게 방해가 되니까 적당한 속도를 내야 했다.


문제는 내가 강습생들 중에 그나마 체력이 좋고 젊은 축에 속한다는 것이다. 의도하지 않게 자꾸만 속도가 났다. 앞에 있는 사람의 발을 몇 번 치다가 아예 중간에 멈춰 기다리기도 했다. 보통 이러면 앞에 있는 분이 알아서 바꿔주시기도 하지만 언니들은 묵묵히 강사의 말을 따를 뿐이었다. 물살이 코와 입으로 들어오듯, 선배 강습생들의 침묵이 마음을 복잡하게 했다. 눈치를 봐선지 그날 수업은 유독 피곤하고 힘들었다.



"다음엔 그냥 알아서 중간에 서 있을까요?"


함께 상급반으로 올라간 언니와 점심을 먹으며 이야기했다. 그 언니 역시 오늘 물보다 눈칫밥을 더 먹었다고 했다. "안돼. 그거 중요하게 생각하는 언니들도 있어. 예전에 같이 수영하던 언니들은 나보고 대놓고 뒤로 가라고 하더라." 평소 수영장 분위기가 좋아서 텃세는 인터넷에서만 볼 수 있는 전설 같은 건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나 보다.


"좀 하다 보면 불편한 사람이 알아서 위치 조정하겠지. 일단은 눈치 보면서 수업에 충실해보자."


다음날 자유 수영을 하러 갔더니 함께 승급한 언니가 풀장에 안 들어오고 머뭇거리는 게 보였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동안 익숙하게 다녔던 중급 레인으로 가니 사람들이 "왜 여기로 와요? 저기 상급 쪽으로 가요!" 했다고 했다.


"그냥 사람 없는 데로 가는 거죠 뭐~ 저랑 같이 가요!"


아직은 낯선 상급 레인으로 가서 언니와 함께 수영을 했다. 어제 수업에 들어오지 않았던 상급반 수강생들이 뒤늦은 축하를 건넸다. 쑥스럽게 감사를 전하고 익숙한 듯 낯선 물속에서 지난 시간에 배운 것들을 복습하는데 뭔가 이상했다. 달라진 건 레인뿐인데 유독 뚝딱 거리는 느낌이 든 것이다. 몸이 축축 처지기도 하는 것 같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풀장에서 나와 샤워장으로 걸어갔다.



수영을 하다 보면 물의 무게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눈다. 아무래도 물을 차고 밀며 나아가는 운동이라 그런 것 같다. 물이 가벼우면 그날은 몸이 잘 떠서 간 것이다. 반대로 물이 무거우면 그날은 뭔가 허우적댄 것이다. 샤워기를 트는데 함께 운동한 언니가 무슨 비밀 이야기를 하듯이 내게 와 소곤거렸다.


"역시 상급반 레인 물이 무거워. 오늘 몸이 좀 무겁지 않았어?"


"아~ 어쩐지 오늘 뭔가 수영이 잘 안 되더라고요."


웃으며 동의하긴 했지만 사실은 그럴 리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물은 하나의 풀장에 담겨있다. 그 위를 둥둥 뜨는 플라스틱 조각들이 가로지르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레인마다 무게가 달라진다니, 말이 안 되지 않은가? 하지만 몸으로 느끼는 건 진짜였다. 스마트 워치를 보니 이전보다 훨씬 적은 운동량을 움직였는데도 심박수가 높은 것을 볼 수 있었다.


"오, 진짜 힘들었네? 음... 물 밀도가 다른가?"


중급반에는 초급반부터 넘어온 수심 조절용 받침대가 있다. 하지만 상급반엔 그게 없어서 가장 깊은 곳으로 가면 유독 물이 깊게 느껴진다. "받침대가 밀도를 바꿔서...?" 그럴듯해 보이지만 말도 안 되는 궤변에 옆에 있던 다른 언니가 웃으며 말했다. "야,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결국 우리는 상급 레인에서 느낀 그 무게가 '마음의 무게'라는 데 의견을 모았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는 부담, 상급반이라는 의식, 수영을 더 잘 해내고 싶다는 다짐 등이 마음에 무게를 얹었다고 말이다. 생각해 보니 우리가 상급반으로 넘어오자, 다들 "열심히 하더니 올 줄 알았다.", "중급반부터 잘해서 눈여겨봤다."는 이야기들을 했다. 평소에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영을 하고 있으면 저 멀리서부터 지켜보는 눈이 많았다. 한줄로 나란히 수영하는 강습 특성 상 가장 먼저 헤엄친 1번 수강생은 진작에 도착해서 마지막 수강생의 폼을 본다.


그런데 수력이 10년 넘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수력 1~2년 차는 아무리 잘해도 초보치고 잘하는 정도다. 능숙하게 한다고 해도 객관적으로 보면 그저 천천히 찰박거리는 사람이란 소리다. 최근에 배우기 시작한 접영이 아직 완벽하게 마스터되지 않은 것도 부담을 느낀 이유 중 하나다. 잘하는 사람들 사이에 끼어 서툰 모습을 관찰당하는 것은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해도 어지간히 신경 쓰였다. 결국 무게가 없는 다른 사람의 시선이, 의식한 순간 팔과 다리에 무겁게 내려앉은 셈이다.


"이게 바로... 상급반의 무게죠."


하지만 그런 부담은 초보자들이 늘 겪는 일이다. 쏴아 하는 물줄기에 거품을 흘려보내며, 무거운 팔과 다리를 마구 문질렀다.


"견뎌야죠."


너무 비장한 모습이었던지 언니들이 전부 웃었다. 그래서 나도 같이 따라 웃었다. 물속에서 느낀 무게가 조금은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 샤워를 하고 나오니 이전처럼 상쾌한 기분만 남아있었다. 열심히 연습하면 또 서툰 초보 구간도 지나가겠지. 상급반 레인에서 수영해도 아무렇지 않은 날을 생각하며 머리를 말렸다. 무거움을 떨치기 위해 더 많은 물살을 가르겠다고 다짐했다. 모든 풀장 안의 물 무게는 같으니까, 그리고 운동하고 나면 기분이 좋으니까 좀 더 자주, 오래 헤엄쳐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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