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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뜬 눈으로 나는

두 아이의 밤을 지나며 알게 된 것들

by 미지의 세계

또 새벽 네 시다. 당장 잠들어도 두, 세 시간 정도만 잘 수 있지만 그래도 억지로 눈을 감는다. '또'라고 한 것은 이런 일이 며칠 째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과 9시 반쯤 이부자리에 눕는데 꼭 새벽에 한번 깨고 그대로 아침을 맞이한다.

얕은 잠들이 이어지고 나면 결코 몸이 가볍지 않다. 그러나 7시 즈음, "엄마, ㅇㅇ이 잘 잤어요!" 상대의 상황보다는 자기 상태를 먼저 이야기하는(게다가 스스로를 3인칭으로 지칭하는) 이 어린아이들을 위해 무거운 몸을 일으킨다. 아침을 차리고 아이들을 씻겨야 한다. 또 옷을 입혀서 어린이집에 보내야 한다. 이 모든 걸 제시간에 해내려면 적어도 7시에는 일어나야 한다! 엄마라는 이름은, 일차적인 욕구보다 더 힘이 세다.


새벽이나 아침이나, 나를 깨우는 알림은 하나 같이 아이들이다. 몇 달 전에 기저귀를 뗀 첫째는 아직 화장실 변기에 혼자 올라가지 못한다. 그래서 요의를 느끼면 보호자와 함께 화장실에 가야 한다. 그런데 자기 전에 화장실을 들려도 꼭 12시 전후로 "엄마, 쉬 마려워요." 한다. 깊은 잠에 들었다가 얕은 잠으로 넘어와서 잠이 깨는 시기가 그즈음인가 보다.

신기한 건 그런 소리는 아무리 작게 말해도 귀에 선명하게 들어온다는 점이다. 아무리 흥미로운 꿈을 꾸고 있어도, 아니면 꿈도 꾸지 않는 깊은 잠에 빠져 있어도 첫째의 목소리는 다 들린다. 그러면 깊은 잠영 중에 급히 수면 위로 밀려 올라오듯 숨을 후욱 내 쉬며 눈을 뜬다.

"참아, 참아!"

아이는 잠이 덜 깨 눈을 비비면서도 순순히 요의를 참으며 엄마의 손을 잡고 화장실을 간다. 간혹 아이가 급하다고 하면 아이를 번쩍 들어 올려 안고 가기도 한다. 그런데 가끔 너무 피곤하면 아이는 뒤늦게 엄마를 부른다.

"엄마, 축축해요...."

이럴 경우 갑자기 현실로 끌려 올라오는 건 똑같지만, 좀 더 힘겨운 절차가 기다리고 있다. 옷장에서 옷을 찾아와 갈아입히고, 축축한 이불과 내의를 바로 세탁기에 넣어둔다. 여기에 새로운 이불을 꺼내 깔아주고 아이를 달래야 하는 것이다.


간혹 둘째의 사이렌이 울릴 때도 있다. 사실 둘째는 이유 없이 종종 새벽에 '으앙' 하고 운다. 아니, 사실 아기들은 아주 여러 가지 이유로 새벽에 운다. 급성장하느라 뼈가 쑤셔서, 자기 방귀 소리에 놀라서, 소변보다가 놀라서 운다... 제삼자는 알 수 없지만 본인 입장에선 정말 그럴듯한 이유인 것이다.

둘째가 울면 정말 난감한 게, 무슨 수를 써도 잘 달래 지지 않는다. 얼른 재우려고 엉덩이를 토닥거리면 내 손을 앙칼지게 쳐버리고, 안아 올리면 싫다고 발버둥 친다. 그리고 그 소리에 첫째도 깬다. 두 아이가 같이 울어버릴 때는 정말 최악이다. 아이들의 울음이 절정에 이르면 오히려 달랠 엄두를 못 낸 채 멍하니 있게 된다.


딱 한번, 두 아이가 함께 울었을 때가 생각난다. 진짜 영혼이 나가버리는 줄 알았다. 청각이 예민해서 큰 소리는 종종 힘들어하는데 그 극한의 상황에서 이 소란을 진정시켜야 하는 미션이 주어진 것이다. 아이들이 화음을 내며 으앙 하고 울자, 나는 잠시 멍하니 있었다. 귀 뒤에서 시작된 심장박동이 머리와 목으로 옮겨가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일단 자리에 앉았다. 그다음 둘째를 얼른 안아 달래고 다른 손으론 첫째를 다독이는, 고도의 연년생 엄마 스킬을 선보였다.

나중에 인터넷을 찾아보니 둘째 연령의 아이가 자다가 우는 건 잠결에 그런 거란다. 그칠 때까지 두거나 살짝 깨우는 것도 방법이라고 되어있었다. 그런데 그냥 둬 보니 몇 십 분을 거뜬히 울어 포기했다. 살짝 깨우려고 아이를 살살 흔들고, 조용조용 이름도 불렀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소란을 끝내는 건 오직 둘째의 마음에 달려있다. 진땀을 빼고 시간을 보면 또다시 새벽 3시나 4시다. 그러니 비단 핸드폰만 하느라 잠을 못 자는, 그런 건 아니고 정말 다양한 이유로 새벽을 하얗게 지새우고 있다.


예전엔 잠을 깨우는 아이들이 정말 미웠다. 소변을 왜 못 가리냐고, 자다가 왜 우냐고 아이들에게 엄하게 말해서 결국 울린 적도 있다. 당시엔 그게 올바른 훈육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또 잠이 안 왔던 어느 새벽에 냉정히 따져보니 그냥 내가 잠을 방해받아서, 기분이 안 좋아서 아이들에게 화풀이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잠이 너무 부족하면 인내심이 완전히 바닥나기 때문이다. 결국 아이들에게 화난 게 아니라 잠을 못 자서 화가 난 거였다.

새벽에 아이들의 행동에 대해 공부한 것도 마음을 바꾼 계기가 됐다. 아이들의 수면 패턴과 행동에 대해 검색하며 살펴보니 성장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일들이 많았던 것이다. 결국 만 3세, 만 1세 아이들에게 '자다 깨서 울지 말라'고 하는 건, 적어도 '크지 말라'고 하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한 요구였다. 본인들도 어찌할 수 없는 자연의 섭리 말이다.


그 뒤로 나는 적어도 새벽에는 화를 내지 않는 엄마가 되었다. 물론 종종 한숨을 쉬거나 입술을 꼬옥 깨물기도 하지만. 피곤하면 낮에 좀 더 쉬면 된다고 스스로를 달래기도 한다. 눈을 감았다 뜨면 자라는 것 같은 이 아이들과 함께 몸을 부비며 잠드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을 거라고 되뇌며 버틴다. 갈수록 나를 깨우는 아이들에게 화가 안 나는 걸 보니 이런 마음 수양이 조금은 효과가 있는 것 같다. 결국 누군가를 키우는 건 마음도 함께 키우는 일이다.

아이들이 엄마를 깨우고 잠들어버린 그 숱한 밤 동안, 나는 더 나은 엄마가 되어간다. 새벽에 엄마를 깨울 수밖에 없는 아이들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공부하고 곱씹는다. 그러는 동안 깊어가는 것은 비단 눈 밑에 거뭇한 다크서클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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