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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지의 세계 Oct 21. 2022

딩크 파트너와 임신을 결심하다 (2)

가족은 계약이 아니니까

 시간과 돈, 두 가지 측면의 대안을 남편은 진지하게 듣기 시작했다. 자신이 포기하기 어려웠던 부분만 충족된다면 아이 있는 삶을 생각할 수 있다고 했다. 다만 ‘개인 시간 보장’이라는 부분을 더 구체화해주길 바랐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내가 아이와 육아에 좀 더 시간을 쓰겠다는 내용이었다.


 계약을 하듯, 몇 가지 구체적인 약속이 오갔다. 우린 아기 천사를 맞이할 수 있었다. 심장 소리를 듣고, 결국 자그마한 손, 발의 형태를 가진 존재를 초음파로 만났을 때 - 남편과 나는 너무나 들뜨고 행복했다. 우리는 이 생명체가 우리에게 올 때까지 만반의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몸과 마음을 가다듬었고, 아이의 공간을 마련해 물건을 들였다.




 그렇게 출산까지 이어졌다면 완벽했겠지만, 그러진 못했다. 이후에 남편은 육아휴직 기간 동안 하고 싶은 일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내가 그의 자유시간을 보장하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같은 기간, 오로지 ‘아이 돌보기’ 계획 밖에 없는 나는 그때 조금 현실을 자각했다. 육아는 부부가 함께 해야 할 일인데 남편을 설득하기 위해 내가 꽤 중요한 걸 포기했음을 알았다. 그토록 원하던 아기가 생겼는데 문득 우울해졌다.


 서로 솔직하자는 건 우리 부부의 암묵적인 룰이다. 남편에게 출산, 육아에 대한 부담감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자꾸 나만 힘들어지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고도 했다. 남편은 별 대답이 없었다. 대신 쉬는 날, 둘 만의 시간을 좀 더 보내자는 제안에 군말 없이 따라왔다. 한동안 아름다운 자연 속을 걷고, 같이 맛있는 걸 먹었다.


 ‘앞으로 어떤 일을 하며 살고 싶은지’, ‘요즘 가장 관심 있는 주제나 콘텐츠는 무엇인지’ 나란히 걸으며 그런 이야기 했다. 이런 시간은 꽤 소중한 것이었다. 우리는 가족을 이뤘고, 곧 누구 엄마, 누구 아빠가 될 것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리는 책 읽기와 산책을 좋아하는 누구, 취향이 뚜렷한 누구 였다. 일상에서 좀 벗어난 얘기들은 서로에게 더 집중하게 했다.


생활비 이야기, 가족 이야기, 회사 이야기... 일상에 꼭 필요한 대화 할 땐 잊고 있었는데 내가 힘들 때 남편은, 생각보다 꽤 든든한 사람이라는 걸 기억해냈다. 나 자체를 궁금해고, 나 위해 조언하거나, 옆에 묵묵히 있는 사람. 그건 연애시절 내가 사랑하던 이의 모습이었다. 이런 사람과 함께이니 어떤 어려움도 조금 수월하게 넘어가지 않을까 싶었다.


평생 살고 싶은 파트너와 원하는 가족상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은 감사할 일이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운이 좋았다. 임신의 주체인 내가 아이를 원했고, 그래서 딩크 파트너와 협의 할 수 있었다. 만약 우리의 성별이 바뀌었더라면 아이 있는 삶을 말하기는 더 어려웠을 것이다. 일단 임신 기간을 하면 여성의 모든 것이 바뀌는데, 그걸 강요하는 건 서로 못 할 일이기 때문이다.



  이성주의자 남편을 설득하기 위해서 임신, 출산도 계약서 쓰듯 협의했던 부분들이 있었다. 협상에 집중하던 시간에서 벗어나니 그 사이사이 빈 공간은 사랑으로 메꿔야 한다는 걸 알았다. 어차피 가족은 이성적인 계약이나 타협으로만 이뤄지는 게 아니다. 어려움 앞에서도 의지할 수 있는 존재를 발견하고 다시 자신감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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