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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박 May 16. 2016

1. 부러진 헤드셋

박사과정의 잡동사니를 시작하면서

석박사 과정으로 들어와 5년쯤 지났을 때였다. 무슨 내용인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내 학위 연구랑 관련된 논문 같은 걸 보고 있었던 것 같다. 결과물이 잘 나올지 확신할 수 없는 실험 결과들과 씨름을 하였고,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박사과정 때문에 하루하루 불안감이 더해져 가고 있었다. 내가 연구 결과를 내고 논문을 쓰더라도, 교수님이 원하시는 결과는 절대 내가 다다를 수 없을 것 같았다. 


‘정말 졸업은 할 수 있을까? 내가 박사가 될 자격은 될까?, 이 과정을 끝내고 나면 정말 그만큼 보상이 있을까?, 아님 나는 재능이 없나?’ 


이런 질문들을 하루에도 몇 번식 머릿속에 맴돌았다. 한 번 시작한 것은 끝내겠다는 조그마한 자존심이 이 상황을 버틸 수 있게 만들었다.



논문을 읽을 때 음악을 들으면, 특히 가사가 있는 음악을 들으면, 집중이 잘 되지 않는다. 영어로 된 논문을 읽어야 되기 때문에 모든 정신은 영어 문장을 완벽히 이해하는 데 사용되어야 한다. 하지만, 가사가 있는 음악을 들으면 머릿속에 영어 논문의 내용과 음악의 가사가 뒤섞여 버린다. 그리곤 이해하기 쉬운 음악만 남아버린다. 결국 논문을 읽었지만, 머릿속에 남는 건 노래 가사이다. 그래서 사실 음악을 잘 듣지 않으려고 한다. 그런데 그날은 음악이 듣고 싶었다. 헤드셋을 끼고, 멜론 차트 100 순위를 듣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안 가서 내 귀가 통증을 느끼곤 헤드셋을 벗어버렸다. 


‘헤드셋이 내 귀에 잘 안 맞나……? 왜 이리 아프지? 내가 언제 이걸 샀더라? 이 헤드셋을 쓴 꽤 오래되었었는데… 아 맞다!! 재성이 형이 졸업하면서 두고 간 물건이었지?’ 


헤드셋은 벌써 4년 전에 (내가 박사 1년 차 일 때 졸업한) 석사 과정의 형(NM형) 이 졸업하면서 나에게 주고 간 물건이란 것을 떠올렸다.




그림 1. 부러진 헤드셋

졸업하고 짐을 정리하던 NM형이 헤드셋(그림 1)을 보고 나에게 말을 걸었다. 


NM: “이거 좀 오래된 거긴 한데 너 쓸래?” 


딱히 헤드셋도 없었고, 헤드셋도 괜찮아 보여서 굳이 거부할 이유도 없었다. 


나: “그래요~ 뭐 그래도 멀쩡해 보이는데 졸업할 때까지 쓰고 제가 버릴 게요.” 


그렇게 NM형은 나에게 헤드셋을 주고 졸업했다. 하지만 멀쩡해 보이던 헤드셋이 몇 달도 안 되어서 다리가 부러졌다. 


‘에이 뭐 어차피 오래 쓸 것도 아닌데 대충 마스킹 테이프로 수리해서 써야겠다.’ 


지금 생각해보면 무슨 배짱으로 오래 쓰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참 오만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노란색 마스킹 테이프를 둘둘 감아서 응급 처리를 했다. 응급 처치한 헤드셋은 테이프로 붙인 부분 덕분에 더는 길이 조절이 불가능해졌고, 나는 내 귀 치수에 맞지 않는 헤드셋을 4년간 더 사용해 왔다. 


아마 그 뒤로도 헤드셋이 또 부러지려고 해서 추가로 마스킹 테이프를 몇 번 더 붙였다. 그 결과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여러 색깔의 마스킹 테이프로 보수되어 있다. 오래 쓰지 않을 거라고, 금방 졸업을 할 거로 생각했던 나의 치기 어린 자만은 오랫동안 내가 헤드셋을 바꾸지 못하게 만들었다. 헤드셋이 더는 쓰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꼭 졸업할 때 버려야 한다는 쓸데없는 자존심을 세우게 만들었다.


‘헤드셋이 먼저 부러지나, 내가 먼저 졸업하나 한 번 보자!’



‘너무 오래돼서 언제 받은 건지도 잊어버리고 있었네….  혹시 이것과 비슷한 물건들이 또 있나?’ 


나는 내 책상 위를 좀 더 살펴보게 되었다. 책상을 살펴보며 나는 내 책상을 구성하는 많은 잡동사니가 나와 함께 대학원 과정을 지냈던, 혹은 먼저 떠나간, 혹은 나를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나에게 주고 간 물건들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어…. 그러고 보니 이 머크사 컵도 졸업한 DB 형이 주고 간 거였지?, 저기 텀블러도…. 노 대표님이 전시회 왔다가 선물로 주신 거였고…. , 저기 종이 모형은 AN 형이 생일 선물로 준 건 데…. 저건 연구실 후배들이 선물로 준 것들이고….'


나의 박사 과정 책상 위를 구성하고 있는 잡동사니 중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선물 받은 것들이었다. 나 홀로 힘겹게 졸업을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는 고독함과 외로움이 주변 사람들에 대한 감사함으로 바뀌게 되었다. 박사 과정을 하는 동안, 실적이 나오지 않거나 논문이 게재되지 않으면 그동안의 노력이 다 쓸모없는 시간이 된 것과 같은 좌절감이 든다. 이런 과정이 5년 동안 지속했으니 5년 간의 노력이 다 어디로 갔나, 나는 내 젊음을 소모해서 얻은 게 무엇인가 하는 좌절감으로 변하였었다. 나 자신의 한계를 계속 부딪치고 좌절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내 책상 위의 잡동사니들을 본 순간 이게 나 혼자만의 싸움이 아닌 것 같았다. 


안도감이 들었다. 


‘박사 과정을 지낸 5년 동안 좋은 사람들을 만났었고, 그 사람들로 인해서 성장하고 또 지지받고 있었구나. 이렇게 나를 지지해 주시는 분들이 있다는 건 내가 내 박사 과정을 지내는 동안 내 젊은 시간을 소비만 한 것은 아니구나….’ 


책상을 구성하고 있는 물건들은 내가 5년간 박사 과정을 통해 성장하는 것을 보여주고 그동안 만난 사람들과의 기억들이 저장되어 있는 트로피들이었다. 책상 위의 물건 하나에 담긴 사람들과의 기억들이 내가 늘 앉아있는 자리에서 나를 지켜봐 주고 있었다. 박사 과정의 책상에 잡동사니들과 그 잡동사니를 준 사람들. 그 물건 하나하나에 얽힌 기억들을 이야기하며 그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다. 


다행히 그 뒤 내 연구는 조금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편이다. 다행히 졸업까지 잘  진행된다면 잡동사니들을 치워버리기 전에 오랜 시간 동안 나를 지지해주고 지켜봐 주었던 분들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분들께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처음으로는 나에게 헤드셋을 주고, 이런 글을 시작하게 해 준 NM형에게 먼저 감사의 글을 전한다. 


“지금은 한 아이의 아빠, 멋진 가장이 된 NM 선배. 형 덕분에 어쩌면 박사 과정의 우울을 벗어나고 여러 사람에게 감사의 글을 쓸 수 있는 계기가 되었네요. 이 글을 쓰는 것도 어쩌면 또 졸업 연구가 아닌 딴짓을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의미가 있을 거로 생각해요. 아직 과정이 끝난 않았지만, 형에게 꼭 졸업 논문과 함께 감사하다고 전하고 싶어요. 감사합니다. 졸업하고 찾아뵐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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