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동안의 박사 예심 준비
학교마다, 학과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크게는 박사과정에는 3가지 큰 시험이 있다. 박사 자격시험, 박사 프로포절, 박사 디펜스이다. 주로 입학- 박사 자격시험- 프로포절 - 디펜스 순으로 이루어진다. 자격시험은 박사를 입학한 지 1~1.5년 이내에 이루어지고, 프로포절과 디펜스는 학과 규칙에 따라서 조금씩 다르다.
우리 학과에서는 프로포절을 디펜스 3개월~1년 전 정도에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나의 경우에는 박사 4년 차부터 프로포절 준비를 시작했다. 빨리 프로포절을 할 수 있을 거란 나의 기대와는 다르게, 프로포절을 준비한 시점부터 거의 1년이 흘렀을 때 겨우 박사 프로포절을 볼 수 있었다. 처음 프로포절을 준비할 때에는 이렇게 오래 걸릴 줄 몰랐기 때문에 1년이란 시간 동안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조금씩 지쳐갔다.
'(2015년 3월) 그래 빠르게 준비하면 두 달 뒤에는 할 수 있겠지... '
'(2015년 5월) 으.. 퀄리티가 아직 안되나? 좀 더 열심해해서 다음 달이면 할 수 있게 만들어야겠다.'
'(2015년 8월) 이번에도 또 미뤄지는 건가? 언제 나는 프로포절을 할 수 있는 걸까? 하긴 할 수 있는 걸까? '
'(2015년 11월) 휴~ 겨우 5명의 커미티 교수님들이 모두 가능한 시간을 찾았다. 이번에는 꼭 할 수 있기를.'
2016년 1월 26일, 고대하던 박사 프로포절을 볼 수 있었다.
다행히 발표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보다 잘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안 좋은 경우의 수들을 사전에 고려했었고 대비가 잘 되어 발표 내용뿐만 아니라 프로포절 진행도 매끄러웠다.
발표를 위해 내가 준비했던 것들을 나열해보았다.
1. PPT 자료 : PPT초안이 나온 다음 5일 정도 지속적으로 리허설을 통해 수정하면서 필수 내용만 30분 안에 잘 발표할 수 있도록 정리하였다.
2. 발표 연습 : 두 차례 리허설을 거쳐서 정말 필요로 하는 내용들만 잘 이야기할 수 있었다. 긴장하면 할 말을 잘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모든 스크립트를 다 써두었다. (30분짜리 발표 전부) 추가로 언제 숨을 쉬어야 되는지도 스크립트에 표시를 해 두었다. 적어둔 것을 여러 번 읽으면서 강조할 부분과 말의 템포 등을 연습했다.
3. 심사위원 개별 미팅과 예상 질문 대비 : 심사위원 교수님들과 프로포절 전에 개인적으로 모두 뵙고 내 연구를 소개해드렸다. 그러면서 교수님들이 하셨던 코멘트에서 예상 질문들을 뽑아내어서 발표를 준비할 때 해당 질문들에 대한 답이 되도록 논지를 정리했다.
4. 다과 : 만화 ‘미생’에서 발표를 준비할 때, ‘발표만 집중될 수 있도록 나머지 것들이 모두 완벽히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라는 것을 봤었다. 그래서 다과 선택에도 신경을 썼다. 혹시나 아침을 못 드시고 오신 분들을 위해, 학교 안에 있는 카페에서 파니니와 커피, 마카롱을 2주 전부터 주문했다. 또한 물, 주스, 과자 등도 함께 준비해서 기호에 맞게 드실 수 있도록 충분히 준비해두었다. 뭐 남으면 연구실 사람들이랑 먹으면 되니깐.
5. 발표 장의 온도 : 1월이라서 그런지 발표장이 매우 추웠다. 그래서 발표 전날 늦은 새벽에 퇴근하면서 발표장의 히터를 켜 두고 갔다. 에너지가 조금 낭비될 수는 있지만, 나에게는 성공적인 프로포절이 훨씬 더 중요했다. 아침에 도착했을 때에는 충분히 발표장이 데워져 있었다.
6. 발표 징크스 대비 : 나는 발표할 때 긴장을 하면 콧물이 나온다. 참으로 추한 징크스다. 그래서 항상 발표할 때에는 휴지를 챙겨둔다. 코를 훌쩍거리면서 발표하는 것만큼 안쓰러운 발표자도 없기 때문이다. 역시 이번 발표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휴지를 준비하고 몇 번 코를 닦으면서 발표를 진행하였다.
7. 발성 : 추운 날, 오랫동안 이야기를 하면 목이 나갈 것 같아 발표대 위에 따뜻한 물과 커피를 (나를 위해) 준비해두었다.
8. 당일 날 발표 준비 : 오전 10시에 발표 시작이 예정되어있어, 9시 30분경부터 발표자료, 음향, 영상, 다과 세팅을 진행하였다. 혹시 일손이 더 필요할 것을 대비해서 연구실 후배 한 명에게 다과 운반과 세팅을 부탁했다. 10분 정도만에 발표 준비가 모두 끝나고 다시 한번 스크립트를 보면서 발표 준비를 했다.
프로포절 발표를 마치고, 질의응답 시간이 왔다.
사실 질의응답이라고 하기보다는 교수님들의 코멘트를 듣는 시간이었다. 들으면서 몇 가지 반박을 하고 싶은 코멘트 들도 있었지만, 분위기가 디펜스가 아니라 ‘이런 부분도 생각을 해봐라' 정도의 코멘트였기 때문에 일단은 모든 코멘트들을 전부 받아 적었다. 그리고 같이 들어왔던 랩 사람들과 지도교수님도 나를 위해 코멘트를 다 받아 적어 주셨다. 이 모든 걸 받아서 교수님들의 코멘트들을 대부분 기록할 수 있었다.
내 연구를 간략히 소개하자면 ‘Do-it-yourself (DIY) 스마트 홈’이라는 제품에 대해서 연구를 하고 있다. 이 제품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어떻게 쓰는 걸 관찰했고, 그 관찰 점을 바탕으로 새로운 제품 콘셉트를 제안하였다.
프로포절의 가장 핵심 코멘트는 DIY 스마트 홈이라는 제품에 대한 근본적인 사용 모델이나 디자인 프레임워크와 같은 이론적인 모델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최근에 나오고 있는 제품이기 때문에 1년마다 비슷하거나 새로운 제품들이 엄청나게 쏟아져나오는데, 이런 모든 제품들을 테스트해볼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제품들에도 범용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모델이 필요하다고 하셨다.
충분히 납득 가는 코멘트였다. 지금 내가 한 연구에서 강조할 수 있는 부분이면서 내가 생각하지 못한 비어있는 부분이었다. 한편으로는 내가 연구를 해 놓고 졸업을 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이 부분이 추가된다면 내 졸업은 필연적으로 미뤄져야 했다. 프로포절 3개월 뒤인 5월에 졸업을 예정하고 있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남은 2,3월 동안 실험과 연구들을 끝내야 된다. 하지만 교수님들이 제안하신 이론을 세우려면 시간이 더 필요했다. 교수님들의 코멘트를 들으면서, 5월 졸업이 매우 힘들겠다는 것을 직감했다.
프로포절은 무사히 통과했다.
교수님께서도 내가 한 양이 프로포절은 충분히 통과할 만한 양이고, 모든 교수님들이 주제가 매우 시기적절하고 흥미로운 연구라고 하셨다. 하지만, 너무 급하게 디펜스를 준비하는 것 같아서 이 좋은 주제를 잘 마무리 짓고 가지 못 할까 봐 걱정이 된다고 이야기하셨다.
예상 한 코멘트였지만, 막상 들으니 조금 막막하고 한편으로는 서운하였다. 어떻게 든 3개월 후에 바로 디펜스를 하자고, 할 수 있다고 지도교수님과 논의를 하였었는데, 프로포절 이후에 너무 쉽게 졸업이 지연되어 버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디펜스 3개월 전에 프로포절을 진행하려면 두 가지 경우 중에 하나 여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번째 경우는, 프로포절 전에 미리 다른 교수님들이 제안할 수 있는 모든 방향을 고려해서 수정하지 않아도 될 연구 계획을 가지고 가야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프로포절 전부터 심사위원 교수님들과 긴밀한 미팅을 통해 그분들의 생각이나 방향을 듣고 연구 방향들을 조율하는 과정이 필요할 것 같다.
두 번째 경우는 다른 심사위원 교수님들이 어떠한 코멘트를 하더라도 지도교수님이 졸업을 시켜야겠다는 강한 의지를 가진 경우이다.
하지만 나는 저 두 가지 경우에 속하지 못했다. 커미티 교수님들도 이미 디펜스까지의 연구계획을 다 세우고 난 뒤 찾아뵀었고, (사실 그 전까지는 내 연구를 진행한다고 커미티분들을 찾아뵐 시간이 없었기도 했다. ) 이전까지의 연구 진행과 계획이 다른 교수님들의 시각을 만족시킬 만큼 다양하게 발전되지도 못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론적으로 디펜스 3개월 전 프로포절을 한다는 건 처음부터 잘못된 가정이었다. 적어도 1년 전에는 하는 게 안정적인 것 같다. (이 부분은 학교나 학과의 문화에 따라서 많이 다를 수 있을 것 같다.) 예전에 3개월 만에 졸업한 케이스가 있었는데, (함부로 이야기 하긴 어렵지만) 그건 2번의 경우, 지도교수님이 어떻게든 졸업을 시키겠다는 의지가 있었던 경우였던 것 같다.
잠을 충분히 자지 못했기 때문에 점심만 먹고 바로 집으로 퇴근을 했다. 방으로 도착해서 온수매트를 켜고 이불속으로 쏙 들어갔다. 가족들에게 전화를 했다.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 프로포절은 잘 통과했는데, 5월 졸업이 가능할지는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에고, 왜 이렇게 자꾸 늦어지냐~ 고생했다."
왜 졸업이 자꾸 늦어지냐는 말에 이제 대답하는 것도 질렸다. 다른 학위과정처럼 일정한 졸업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은 것은 나뿐만 아니라 나를 기다리는 가족에게도 마찬가지로 힘들고 인내심을 요하는 시간 같았다. 무엇보다 '혹시 내가 더 열심히 했으면 더 나은 결과가, 더 빠른 졸업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나의 무능력함, 나의 불성실함, 내 능력의 부족으로 주변 사람들을 실망시켰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마지막으로 동생에게 전화를 했다.
"나: 프로포절 은 잘 끝났는데, 아쉽게도 졸업은 또 미뤄진 것 같아..."
“동생: 대학원이 원래 그런 거잖아, 고생했어.”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눈물이 뺨을 타고 계속 흘러내렸다.
목이 메어 고맙다는 이야기 동생에게 하지 못한 채 전화를 끊고, 혼자 이불속에서 30분 동안 엉엉 흐느끼며 울었다.
‘원래 그런 거잖아... 원래 박사과정은 힘들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거잖아. 단지 내가 모자라서 못해서 그런 게 아니라 나는 원래 그런 길을 가고 있는 거잖아.' 가족 중 최소 한 명에게서라도 이해받았다는 것에서 안도감이 들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