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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박 May 24. 2016

2. 커다란 머그컵

박사과정의 기회비용

2015년 초 오랜만에 연구실 대청소를 했다. 청소를 하던 중 연구실 세면대 밑 수납장에서 나온 머그잔 하나를 찾았다. 꽤 큰 머그잔이라 물이나 커피를 많이 마시는 나에게는 딱 맞은 것 같았다. 얼마 전 머그잔을 잃어버렸는데, 새로 쓸만한 좋은 컵이었다. 졸업생이 두고 간 머그잔이라고 생각되어 날름 가지고 왔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예전에 DB선배가 사용했던 머그잔 이었던 것 같아서 DB 선배에게 머그잔 사진을 한 장 찍어 보내줬다(그림 2).


그림 2. 스타벅스 머그컵


나: “형 청소하다가 이 머그잔 찾았는데 제가 써도 돼요?”

DB: “아 머그컵을 놔두고 왔었네. 네가 잘 써줘 ~!”


그 날 이후 커다란 머그잔은 내 책상 위의 필수품이 되었다.



DB 선배는 뭔가 어른스러워 보이면서도 가끔 허술한 면이 보이는 형이었다. 지금은 결혼하고 한 아이의 아빠가 되었지만, 연구실에서의 기억은 교수님이 보시는 데에도 연구실에서 게임을 하는 대담한 형이기도 했다. DB 선배는 예전부터 큰 야망을 품고 있었는데, 창업하기 위해서 연구를 한 아이템을 가지고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면서 다녔던 것이 기억에 남았다. 석사과정을 밟으면서 해외 유명 대기업에서 인턴도 오랜 시간 하고, 결국 졸업 후 좋은 대기업에 입사하였다.


DB형이 졸업하고 학교를 떠난 다음 1~2년 정도 되었을 때 다시 만났다. 예전에는 대기업을 조금 다니다가 꼭 창업할 것이라고 자신했던 형이 조금씩 생각이 바뀌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전의 선배의 모습과는 굉장히 다른 모습이라서 조금 놀라기도 했지만,  결혼을 앞두고 있고 학교가 아닌 회사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면서 생각이 바뀐 것 같았다. 나 역시 지금은 창업을 꿈꾸고 있지만, 막상 회사 생활을 하고 결혼을 하게 되면 DB형처럼 지금 생각하는 미래와는 많이 달라질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 이후 DB선배를 만났을 때는 우리 지도 교수님의 수업 시간이었다. 해외 대기업 연구소에서 연사분이 오셔서 특강을 하시는데, DB형이 친분이 있던 분이라 수업에 참관하게 되었다. 그 수업 시간 동안 DB형과 옆자리에 앉아서 이야기를 하다가, 형이 이제 곧 아빠가 된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 들었다.


DB: “해줄 이야기가 있는데, 나 이제 아빠가 된다.”

나: “네?? 우와! 형 진짜 축하해요!”

DB: “ 고마워. 아직 나도 잘 실감이 안 난다.   근데 박사 과정이 길긴 긴가 보다, 난 그동안 결혼도 하고 아이도 생겼는데, 아직 박사과정이 끝나 지가 않네….”


나: “(...) 하하…. 그렇죠… 박사과정이 길긴 기네요.”


솔직히 저 이야기를 듣고 굉장히 충격을 받았다. 물론 형이 나쁜 의도는 없었겠지만 오랜 시간 동안 졸업을 하지 못하는 나로서는 ‘내가 결혼하고, 아이를 가질 동안 넌 아직 박사를 끝나지 못했구나’라는 비난의 이야기로 들렸다.


약간 멍한 상태로 대답하고 넘어갔지만, 그날 저녁은 많은 생각들로 잠이 오지 않았다. 무엇보다 잠이 오지 않아 던 건 형이 했던 말들이 대부분 사실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1) 박사과정이 길긴 길다. 난 6년째 박사 생활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마 더 길어지겠지)

2) 실제로 형이 그동안 결혼도 하고 아이도 생겼다.

3) 그동안 나는 아직 졸업을 못 했다.


반대로 생각을 해보면 내가 만약 박사에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아마 취직도 하고, 안정적으로 돈도 받았을 것이다. 아마 결혼도 했을 수 있고, 아이도 생겼을 수도 있겠다. 


어쩌면 박사 과정에 입학한다는 것은  안정적인 직장과 수입, 배우자와 혹시나 모를 내 아이를 포기하고 온 길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박사과정으로 들어오면서 내가 얻는 것은 무엇일까? 자기 발전? 연구 능력 향상? 연구할 수 있는 시간? 박사학위? 뭐 몇 가지 것들이 생각나긴 하지만, 이런 요소들이 안정적인 수입, 내 생활, 배우자, 나의 아이보다 더 중요한 가치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나에게 박사 학위가 이런 다른 가치들보다 중요한 거일까? 박사학위를 따는 것이 안정적인 직장과 돈,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을 희생할 만한 가치가 있을까? 솔직히 말하면 아닌 것 같다. 누군가 내가 박사 과정으로 입할 할 때 4~5년 동안 박사 과정을 간다는 것의 의미와 희생해야 되는 것들을 이야기해 줬다면 이 길로 오는 것을 좀 더 심각하게 고민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4~5년 동안 내가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전해 듣지 못했었다. 내가 입학을 할 때에는 알지 못했지만, 졸업할 때가 되어서야 비슷한 시기에 졸업을 한 친구들과 비교가 되면서 박사과정을 하는 동안 내가 포기해야 되는 기회비용이 무엇인지를 새삼 체감하는 것 같다.  


요즘은 박사 과정으로 진학하는 친구들을 만나면 4~5년 동안 포기해야 될 기회비용들을 꼭 이야기해준다. 당시 나는 연속되는 논문 탈락과 오랜 박사 기간 때문에 심신이 상당히 지쳐있는 상태였는데, 이 일과 몇 가지 다른 사건들이 겹쳐져서 우울증이 오고 상담센터를 다니게 되었다. 다행히 지금은 좋은 곳에 논문도 게재되고, 연구도 진행되고 있어서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다.


DB형 덕분에 굉장히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반대로 박사과정의 가치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만큼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의 반증도 되었기 때문이다. 아직 졸업을 못 해서 그런지 지금까지는 박사학위라는 것이 정말 그렇게 대단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 학위를 따고 난다면 좀 더 마음 편하게 ‘그땐 그랬었지’라는 마음가짐이 될 수 있을지 기대해본다.


‘DB형 먼저 졸업하고 멋진 회사에 다니면서 가정을 꾸리는 모습을 보니깐 굉장히 부러워요. 형이 한 말 때문에 힘들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제가 박사과정을 하는 의미를 좀 더 찾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졸업한 다음에 논문과 이 글을 들고 찾아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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