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한 파묵 <내 이름은 빨강>
좋아하는 이름은 늘 바뀌었어요.
처음 기억나는 이름은 짱아. 옅은 황금빛 털실이 고불거리는 머리카락에, 순박한 눈빛을 지니고, 살굿빛 동그란 코를 가진, 버터 색깔 멜빵을 입은 인형의 이름이었지요. 그 인형의 이름이 짱아가 된 이유는 간단했어요. 엄마가 그렇게 불렀기 때문이었지요.
세상 모든 것에는 당연히 날 때부터 이름이 있는 줄 알았지만 이름이 없는 존재들도 있었어요. ‘내’가 누군가에게 이름을 지어준다니! 그런 대단한 일을 상상하지 못했던 어린 나를 대신해 엄마가 가볍게 지어준 이름이었겠지만 ‘짱아’라는 이름은 그 인형과 제법 잘 어울렸습니다. “짱아야!”하고 부르면 주근깨가 흩뿌려진 볼을 붉히고 ‘오’하는 입모양의 입이 금방이라도 달싹이며 대답할 것 같았지요.
짱아는 특별히 애착인형도 아니었고, 언제부터 우리 집에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짱아를 시작으로 매년 시간이 더해질수록 나에겐 수많은 인형 친구가 생겨났다는 사실이었어요.
여전히 이름이 없다는 것은 이해가 잘 되지 않았지만, 짱아는 짱아였으므로 다른 인형 친구들에게도 이름이 필요했습니다.
처음엔 주변에서 자주 들어왔던 이름이나 원래 있던 캐릭터 이름을 따서 곰돌이, 곰순이, 키티 등으로 불렀습니다. 이름을 짓는다기 보다는 찾아준다는 것과 가까운 감각이었지요. 가끔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 때는 인형 라벨에 붙어 있던 제조사 이름을 따서(인형에게는 고향의 이름과 같은 느낌으로) ‘자미나’라는 이름을 붙여주기도 했지요.
하지만 조금씩 시간이 흐르면서 내 생각을 담아 인형들의 특징을 잡아서 이름 지어주곤 했습니다. 일곱 살인 나와 키가 비슷할 정도로 커다란 인형은 덩치가 크다고 덩치, 고불고불한 털에 눈이 파묻혀 순해 보이던 강아지 인형은 복슬이, 빨간 별 모양 꽃을 들고 있던 흰곰 인형은 흰별이 같은 이름으로요.
내 느낌과 내 생각이 들어간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신나는 일이었습니다. 이름을 하나하나 부여해 주는 순간은 내가 그 인형의 태어나면서 사라질 때까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켰지요.
이후로는 어감이 예쁘다고 생각한 글자를 엮어 이름 짓기 시작했습니다. 빨간 멜빵 토끼 인형에게는 ‘토나’라는 이름을, ‘챠밍스쿨 미미’라는 인형을 어린이날 선물로 받았을 때는 ‘챠’라는 듣도 보도 못했던 어감에 반해 ‘챠’라는 성을 붙여 ‘챠미미’라 불렀지요.
이 시기는 내 이름을 뜯어 이것저것 조합을 바꿔보던 때이기도 했습니다. 내 이름의 성이 엄마 성이었다면, 아니면 다른 이름이었다면, 거꾸로 읽어본다면 하는 생각을 하곤 했지요. 엄마의 성을 쓰고 지금보다 더 이국적인 이름을 갖고 있는 상상 속의 ‘나’는 책상 밑으로 여행을 떠나는 지금의 나보다 조금 더 멋진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살아 있는 것들의 이름을 지을 때쯤엔 조금 더 나이를 먹기도 했고 창의력과 성의가 생기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맘때는 이름 짓는다는 것에 약간의 책임감을 느꼈던 건지도 모릅니다. 학교 신발장에서 주운 병아리에게는 내 이름의 일부를 따서 이름을 지었거든요. 마치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거대한 한 가문의 역사를 수여하는 듯한 느낌으로요.
내 이름의 한 글자를 따서 꼭 사람 같은 이름을 가진 병아리는 무럭무럭 자라서 집안을 종횡무진 날아다니는 독수리처럼 자랐습니다.
살면서 그때처럼 많은 이름은 지어본 적이 있었을까요? 책상과 의자, 일기장, 아끼는 펜, 길가에서 만난 고양이, 등굣길에 보이는 바위까지도 내가 지은 이름을 붙였습니다. 세상은 나로 가득했지요. 독수리처럼 위풍당당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무서워하는 것에는 이름을 붙이지 않았어요. 깜박이는 눈이 고장 난 인형의 이름은 끝까지 인형이었고, 인형놀이 시간에 늘 악당이 되어야 했던 까맣고 못난 인형은 귀신이나 괴물이었습니다. 또는 저것, 뭔가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 무시무시한 ‘뭔가’들로부터 인형나라의 원로 인형이 된 짱아는 인형들을 지키던 장군 역할을 해냈습니다.
그런데 언제였을까요. 우리 집에 처음 나타난 기억처럼 희미하게, 짱아는 사라졌습니다.
그래도 인형나라는 제법 안전했습니다. 이름 없는 것들 사이에서 이름 있는 친구들이 똘똘 뭉치면 어떻게든 잘 지낼 수 있었어요.
하지만 짱아가 사라진 뒤로 이름 짓는 일은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시골집으로 간 우리 집 중병아리는 닭이 되지 못했고, 인형 친구들은 친척 동생 집으로 가거나 인형 나라를 떠난다는 인사를 남긴 채 사라졌습니다. 그렇게 인형 나라는 있는 듯 없는 듯 보이지 않는 환상의 섬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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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주위를 둘러봅니다. 내 곁에 있는 베개, 볼펜, 노트북, 아로마 오일…. 이들의 이름은 어디로 갔을까요?
지금, 내 이름은 무얼까요.
좋아하던 장난감의 이름을 기억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