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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요 Mar 22. 2019

가축 대신 연예인과 일할 수 있다고?

1996년 상반기. 나는 돼지고기와 쇠고기, 닭고기의 하루 판매량과 시세를 체크해 매일 팩스로 각 농가와 정육공장에 집어넣어주던 일을 하고 있었다. 그게 대체 무슨 일이야? 싶겠지만, 그런 일이 있었다. 지금은 인터넷에서 뭐든 검색하면 나오는 세상이지만 당시만 해도 인터넷은커녕 하이텔과 천리안이 삐익~삐리리 신호음을 발신하며 파란 화면에서 접속을 하던 시대였다.

비가 오고 천둥이 치는 악천후의 날씨에는 팩스가 자꾸 끊겨 밥도 못먹고 야근을 해야 했다. 농가에선 한시가 급하게 시세가 필요한데, 이 놈의 팩스는 먹통이니 몇 번이나 반복해서 번호를 누르고 종이를 쑤셔 넣으며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나는 그 회사에 다니면서 한국방송광고공사(KOBACO, 이하 코바코) 부설 광고교육원에 다녔다. 

지방대 국문과를 졸업한 나는 수많은 광고회사와 잡지사, 언론사 등에 원서를 쓰고 가뭄에 콩나듯 면접을 봤지만 다 떨어졌고, 엉뚱하게 복사기 영업사원으로 취직해 서울에 올라와 봤더니, 내가 카피라이터로 취직할 수 있는 아무런 스펙을 갖추지 못했다는 걸 깨닫게 되었고, 뒤늦게 스펙을 갖추기 위해 코바코 광고교육원에 들어갔던 것이다.


광고교육원에는 나처럼 제일기획이나 대홍기획 등에 들어가고 싶어하는 대학생들이 바글바글했다. 교육과정이 끝나갈 때쯤, 명문여대를 다니던 교육원의 후배 하나가 “언니, 제가 이런 회사에 가면 잘 다닐 수 있을까요?”하면서 뭔가를 보여줬다. 서태지와아이들, Ref 등 연예인의 초상권과 팬클럽을 관리하는 회사에서 카피라이터를 뽑는다는 공고였다. 어디서 이런 걸 봤냐고 했더니, 자기네 학교의 과사무실에 붙은 공고라는 거였다.

그 친구는 우리나라 제1의 광고대행사인 제일기획을 목표로 취업준비 중이었기에 이렇게 작은 회사에 들어가서 만족할 것 같지가 않았다. 만약 들어가더라도 방황하다가 곧 그만둘 것 같았다. 이를테면 조중동을 목표로 언론고시 준비를 하던 취준생이 듣보잡 인터넷 매체에 들어간다는 거와 진배없었다. 

"너는 여기서 만족 못할 것 같은데? 공부 더 해서 제일기획 들어가.” 솔직하게 말해주고, 내가 대신 넣어보겠다고 했다.

나는 지금도 충분히 작은 회사(전직원 5명)에 다니는 데다, 소, 돼지가 아닌 연예인들과 일을 하게 된다니 무지 재밌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곳이 바로 위(we)프로덕션이다. 우리나라 최초로 연예인의 초상권을 관리해주는 회사였다. 초상권이 무엇인지도 사람들이 잘 모르던 시절, 연예인이라도 매니지먼트에서 알아서 했지 초상권만 따로 떼어 관리하는 사람은 없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위프로덕션에는 채송아라는 걸출한 카피라이터가 있었다. 서태지와 아이들과 함께 데뷔해서 일하다가 서태지와 아이들이 은퇴하자 자신도 같이 은퇴한 전설의 카피라이터! 서태지와 아이들의 마지막 앨범 제목인 ‘엔드(End)가 아닌 앤드(&)’도 채송아의 머리에서 나온 카피였다. 

그 채송아의 후임을 뽑는 자리였다.


물론 나는 그때까지 채송아가 누군지 몰랐다. 서태지와아이들 팬덤 안에서 유명했던 사람이라, 서태지와아이들의 음악조차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내가 알 수 없었다. 내가 대학교 2학년 때 데뷔한 서태지와아이들은 그야말로 가요계의 지형을 바꾸어 놓았는데, 당시 기숙사 생활을 하던 나는 룸메이트들이 틀어놓은 서태지와아이들 1집을 좋아할 수가 없었다. 넘나 이상한 노래였다. 1년 뒤 나온 2집도 선물 받았으나 그 역시 듣다가 시끄러워서 다 못 듣고 껐다. 이후 서태지와아이들은 대청소할 때 문 활짝 열어놓고,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듣는 노동요였다.

모집 공고에는 이력서와 자기소개서 외에 서태지와아이들, Ref 등 현재 위프로덕션에서 관리하고 있는 연예인에 대한 글을 써서 보내라고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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