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우리 회사에서 관리하던 연예인은 Ref, 언타이틀, 영턱스클럽, HOT 등이었다.
회사의 직원들은 주업무 외에 각자 한 팀씩 담당이 있었다. 예를 들어 디자이너인 A씨는 언타이틀 담당, 경리인 B씨는 영턱스클럽 담당 하는 식이다. 나는 카피라이터이자 Ref 담당이었다.
그 담당들이 무슨 일을 하냐면 각 연예인의 팬클럽을 담당했다.
어차피 팬클럽 회보는 카피라이터가 글을 손보고, 디자이너가 편집을 하기 때문에 협업했고, 팬클럽 행사는 우리 회사와 계약된 외주 이벤트 회사가 있어서 그 회사에서 담당을 했다.
그렇다면 담당자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뭐였을까? 바로 사서함 녹음이다.
요즘은 카페와 인터넷을 통해 모든 게 공유되지만, 당시엔 인터넷도 없었고, 핸드폰도 상용화되기 전이었고, 첨단을 걷는 사람이 기껏 삐삐나 차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중고등학생들이 ‘오빠’들의 스케줄을 알 수 있는 통로는 사서함뿐이었다. 사서함 전화란 지정된 번호로 전화를 하면 녹음된 음성이 들리는 전화인데, 일반 전화보다 좀 비쌌다. 공중전화가 20원일 때, 사서함 전화는 100원인가 50원인가 했었다. 우리는 사서함 전화를 통해 아이들의 코묻은 돈을 긁어모았다.
별로 큰 돈이 아닌 것 같지만,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녹음을 했고, 스케줄이 변경되면 수정 녹음을 했기 때문에 전국의 아이들이 수시로 사서함전화를 해댔다.
각 담당자는 매니저에게 스케줄을 받아 적고, 조용한 사무실에서 전화기를 들고 녹음했다. 사서함 전화를 녹음할 때마다 “쉿! 지금부터 녹음합니다.”하면, 다른 직원들이 조용히 해주었다.
“안녕하세요? Ref 팬클럽 친구들. 벌써 3월도 다 갔네요. 새학기 적응 잘 하고 계시죠? 이번주 오빠들의 스케줄을 알려드릴게요. 00월 00일 0요일 0시, 생방송인기가요 녹화가 있구요, 이번주에 신곡 000가 1위 후보곡에 올라갔으니까 전화 투표 열심히 해주시는 거 잊지 않을거죠?”
이런 식으로 스케줄을 읊어주며 1~2분짜리 녹음을 했다. 그것도 녹음이라고 인사말과 마무리를 어떻게 할지 짜내고, 녹음하다 말이 엉키면 버튼을 눌러 삭제하고 다시 녹음했다.
나는 고향에서 올라온 지 2년도 되지 않아 경상도 억양이 그대로 있었고(뭐 지금도 완벽한 서울말을 구사하지는 못한다. 쩝), 전 직장에서 전화를 친절하게 받지 못한다고 사장에게 야단 맞고 울었던 기억도 있어서, 사서함 녹음이 굉장히 부담스러웠다.
나름 서울 억양으로 해보려고 노력하지만 그게 잘 될 리 없다. 그래도 일이니까 꾸역꾸역했고, 계속하다 보니 이력이 붙어 그럭저럭 사서함 녹음은 당연한 일과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사무실에 놀러온 학생이 배지도 사고, 브로마이드도 산 다음, 나에게 수줍게 노트를 내밀었다.
“Ref 사서함 언니시죠? 사인해주세요.”
이게 뭔 소린가? 멀뚱히 쳐다봤더니 “언니, 사서함 녹음할 때 특유의 억양이 있잖아요? 귀여워요. 요즘 우리 반에서는 언니 말투 따라하는 게 유행이거든요.”라고.
하하하하....굉장히 부끄러워하며 사인을 해준 기억이 난다. 이제와 고백하지만, 그 순간 나의 경상도 억양에 대한 트라우마가 씻은 듯이 나았다. 나에게 전화 좀 친절하게 받으라고 했던 사장, 듣고 있냐? 너 때문에 도졌던 병이 그 고딩 덕분에 날아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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