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 이야기
여러부운~~~ 여러부우운~
부우우우~~~자 되세요
밀레니엄의 첫 해를 무사히 보내는 기쁨과 다가올 새해에 대한 기대가 한껏 어우러졌던 2001년의 연말, 티비를 타고 광고 하나가 흘러나왔다. 광고에선 새하얀 설원을 배경으로 산타클로스처럼 새빨간 옷을 입은 유명 배우가 얼굴 가득 순수한 웃음을 함박 지은채 청아한 목소리로 사람들을 향해 기쁜 듯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ㅇㅇ카드사 광고였던 이 광고는 당시 최고의 배우였던 김정은 씨를 캐스팅해 모든 국민에게 기쁨을 가득 담아 "부자 되세요"라 외치는 장면을 전국에 내보냈다. 부자가 되라는 말이 금기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널리 퍼트릴만한 말도 아니었던 시절이었음에 '부자 되세요'란 멘트는 당시로선 정말 파격적인 멘트가 아닐 수 없었다.
송충이는 솔잎만 먹어야 했고 부자는 아무나 될 수 없다고 생각했기에 사람들에게 소리쳐 말할만한 인사는 절대 아니었던 멘트가 당당히 전 국민에게 동시 다발적으로 날려졌던 것이다. 그것도 복을 기원하는 덕담을 주고받아야 할 연말연시에.
당시만 해도 사람들은 아직 부자는 타고나는 것이며, 부자가 되는 것보다 각자의 분수를 아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시절이었다. 분수를 모르고 갈잎을 먹은 송충이는 비극을 피할 수 없었다. 부자가 아닌 사람들에게 있어 부자는 자신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존재였고, 행여 분수를 모르고 함부로 부자가 되려 하는 자의 결말은 정해져 있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부자가 되라는 말은 결코 덕담이 아니었다. 사람들에겐 부자가 되는 것보다 근면, 성실, 선함 같은 비물질적이고 인간적인 면이 훨씬 중요했고, 그런 것들을 잘 지키고 살면 언젠간 '복'을 받게 된다 믿었다. 비(非) 부자에게 있어 최고의 가치는 '재물'이 아니라 '복'이었다.
그들도 정정당당하게 부자가 될 수 있는 길은 있었다. 하지만 그 길이란 건 기껏해야 복권 당첨 정도였고 그마저도 '복'의 부산물 정도로 여겨졌다. 그것이 비(非) 부자가 가질 수 있는 최상의 솔잎이았다.
그랬던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한 광고가 모든 것을 뒤흔들어 놓은 것이다.
'응? 부자? 부자가 되라고? 누가? 내가? 놀리는 건가?'
저 광고를 처음 봤을 때 나는 어리둥절했다. 부자가 되라니? 어딜 봐도 부자가 전혀 아니고 부자 될 생각을 해본 적도 없는 내게 광고는 부자가 되라고 당당히 소리쳐 얘기하고 있었다. 송충이에게 갈잎을 먹으라고 당당히 부추기고 있었다. 더구나 타인의 복을 빌어야 하는 연말연시에 부자가 되라고 빌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코웃음이 났다.
"미칬네 미칬어. 쯧쯧.... 뭐어 부우자? 부우우우자? 부자는 머 아무나 되나? 그라아고 부우자아아? 부자 머머 그기 머시라고. 부자는 오데 똥도 안 싸고 사나? 사람 사는거이 다 똑같다. 마 치아라케라. 밥 잘무그면 그기 부자다. 오데서 말도 안 되는 입바른 소리를 씨부리쌌노. 가시나가 미칬네 미칬어."
광고를 보신 아버지는 혀를 끌끌 차며 철없는 짓거리를 한다고 얘기했다. 어머니의 반응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그렇지만 우리 가족이 어떻게 느끼건 말건 상관없이 티비를 틀 때마다 지치지 않고 나오는 광고는 "부자 되세요"를 연신 외쳐댔다. 정이 들려면 자주 보는 게 제일이라고 했던가. 쉴 새 없이 송출되는 광고를 보면서 처음 느꼈던 어색함과 불편함은 점점 희미해져 갔다. 그리고 어느샌가 새로운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부자가 될 수 있는 건가? 아니 되어도 되는 건가? 진짜?'
'그래 또 모르지. 갑자기 하늘에서 돈벼락이 뚝 떨어져 하루아침에 부자가 될지도. 앞으로 돈 많이 버는 일을 해서 부자가 될지도. 내가 부자가 되지 말란 법도 없잖아.'
주변 사람들의 생각도 하나 둘 바뀌어가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아버지도 더 이상 혀 차는 소리를 하지 않았고 어머니는 뭐가 좋으신지 광고를 보며 빙긋이 미소 짓기도 했다. 이듬해 새해 인사는 단연 '부자 되세요'가 1등이었다. 어느새 '부자 되세요'란 말은 유행어가 되었고 사람들 사이에 종종 인사처럼 오갔다. 드디어 부자가 되라는 말이 덕담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앞서 말했듯 광고 하나가 모든 걸 바꿔놓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광고가 대한민국의 어떤 과도기 시점과 맞물려 부자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는데 일정 수준 이상의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이 광고는 그동안 사람들이 마음속에서 꺼낼 생각 없이 가지고만 있었던, 혹은 저 먼 우주의 별처럼 바라만 보았던 '부자'를 현실 세계로 끌어내렸으며 부자에 대한 인식과 경계를 낮춰 주었다.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으며 물질이나 돈을 바라는 게 나쁜 일만은 아니란 생각을 가지게 해 주었다. 가슴속 열망이 잘못된 게 아니란 걸 알려주었다. 그리고 부자 되라는 말이 기분을 좋게 만든다는 것도 알게 하였다. 지금 봐도 정말 획기적인 광고라 생각한다.
(광고의 컨셉은 이와이 슌지의 '러브레터'에서 가져왔을 것이다. 러브레터가 99년도에 개봉했으니 벤치마킹? 정도였지 않을까? 어쨌든 김정은 배우의 이미지와 설원, 그리고 빨간 옷의 컨셉이 상당히 잘 먹혔다고 생각한다.)
2001년의 한 광고가 전 국민에게 부자가 되라고 마음을 다해 외치는 바람에 부자는 더 이상 나와 상관없는 낯선 존재가 아니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부자가 되라고 외치기만 했을 뿐 정작 어떻게 부자가 되는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광고가 원한 건 그저 카드를 열심히 써주는 것뿐이었을 테니. 그들이 노린 건 부자들만 돈 쓰는 건 아니라는 거, 부자가 아닌 사람들도 좀 쓰고 살아도 된다는 거, 돈이 없다고? 그러면 카드를 쓰면 된다는 거, 그러면 부자가 된 기분을 느낄 수 있다는 거, 너희들도 돈을 쓰고 싶지 않냐는 거. 다들 부자가 되고 싶어 하면서 왜 그렇게 빼고 있냐는 거. 그러니깐 어서어서 카드라도 만들어서 쓰라는 거. 그들이 원한 건 그런 것이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부자가 될 수 있을까? 저 하늘의 별인 줄만 알았던 '부자'가 먼 하늘이 아니라 좀 열심히 걸어가면 닿을 수도 있을 것 같은 저어기 산봉우리쯤에 걸친 것으로 변했는데 도대체 그 산봉우리엔 어떻게 가야 하는 걸까? 당시의 광고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지만 그로부터 20년도 더 지난 지금은 그 방법이 속 시원히 나와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