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 라가 아니라 밸의 주체가 문제다
워라밸. 언론에서도 하도 많이 언급하는 단어라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워크 앤 라이프 밸런스(Work and Life Balance)의 약자로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춘다는 뜻의 신조어다. 서서히 유행하기 시작하더니 『트렌드 코리아 2018』에서 키워드로 꼽으면서 화두가 되었다.
일과 삶의 균형이라는 뜻의 이 단어는 보통 '앞으로 나 칼퇴하리라'라는 뜻으로 쓰인다. 팀원들이 이 단어를 쓰면 상사들은 긴장한다. 그럴 만도 하다. OECD에서 발표한 '2017 고용동향'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1인당 평균 노동시간은 2,069시간으로 OECD 회원 35개국 중 두 번째로 노동시간이 길다. 평균 1,764시간보다 305시간 더 일한다. 반면 시간당 노동생산성은 28.9달러로 28위다. 평균 46.7달러의 62퍼센트 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는 시간에 비하면 돈을 적게 받고, 생산성에 비하면 돈을 많이 받는 나라의 노동자다.
어떤 직업은 시간당 산출물이 어느 정도 일정하기 때문에 시간당으로 임금을 받는 것이 맞다. 하지만 소위 말하는 지식노동자는 시간당 산출물이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논리적으로는 얼마만큼의 성과를 냈는지에 따라 임금을 받아야 한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임금을 많이 받는 것일까 적게 받는 것일까?
몸은 사무실에 있지만 전혀 생산적이지 않은 시간들이 있다. 앞서 언급한 관리자와 실무자의 일정 문제로 낭비되는 시간들이다. 할 일을 마쳤는데 집에 못가는 상황도 있다. 내 일이 먼저 끝났으면 동료의 일을 도와주는 것은 직장인의 의리이자 미덕이다. 그런데 동료들의 일도 다 끝났는데 단지 상사가 사무실에 아직 남아있다는 이유로 집에 못 가는 건 조직의 패악이다.
회식은 직장인을 괴롭힌다. 우리나라의 회식 문화는 전 세계적으로 악명이 높다. 세계보건기구의 연구[1]에 의하면 우리나라 성인 남성은 연평균 21리터의 알코올을 마신다. 소주를 21리터 마신다는 뜻이 아니라 마시는 술에 포함된 순수 알코올의 양이 21리터라는 뜻이다. 우리나라 남성보다 술을 많이 마시는 국가는 러시아, 우크라이나, 루마니아 등 독주를 즐겨 마시는 국가들밖에 없다.
식사를 함께 하는 것은 사람과 사람이 함께 일하는 데 중요한 요소이다. 그런데 선약이 있는데 상사 기분에 따라 갑자기 회식을 잡는다든지, 회식에 참석하지 않거나 일찍 가려는 사람에게 눈치를 줘서 팀워크가 다져질까? 회식 시간을 공지해놓고 그 날 못 오는 사람이 있으면 전부 올 수 있는 날로 회식을 옮기라는 상사는 과연 직원들을 배려하는 걸까, 괴롭히는 걸까.
이런 사람들이 꼭 하는 이야기가 '회식도 근무의 연장선'이라는 것이다. 회식은 근무의 연장이 아니다. 업무상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면 술집이 아니라 사무실에서 정식으로 면담을 해야 한다. 혹시 평소에 팀원들에게 하기 어려웠던 이야기를 술기운을 빌려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참아야 한다. 서로 감정만 상하고 전달하려던 내용은 하나도 전달이 안 될 것이다. 단합을 위한 회식이라면 점심시간에 하거나 근무시간 중에 다른 활동으로 대체해도 충분하다. 근무시간에 근무를 하고 퇴근 시간 이후에 회식을 하면서 회식도 근무의 연장이라는 논리는 앞으로 점점 받아들여지기 힘들 것이다(아니면 정말 회식에 야근 수당을 주던지).
첫 직장에서는 회식이 자주 있지는 않았지만 회식을 하면 새벽 한두 시가 되는 경우가 흔했다. 두 번째 직장은 회사 회식에서 술을 잘 마시지 않아 회식도 거의 없고 늦어도 9시 이전에 회식이 끝났다. 예전엔 술을 싫어하는 사람도 무조건 회식 자리에서는 강제적으로 몇 잔이라도 술을 마셔야 하는 분위기였다면, 이제는 술을 마시지 않겠다는 사람들의 의사를 어느 정도 존중하는 것 같다. 쓸데없는 회식과 술자리만 줄여도 워라밸 논란이 줄어들 것이다.
워라밸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다. 핑크퐁으로 유명한 스마트스터디의 박현우 공동 대표는'사업의 기복이 심하고 시장 변동에 흔들리기 쉬운 스타트업에서 워라밸은 결코 1순위가 될 수 없다. 스타트업에서 최고의 복지는 개인의 성장과 연봉'이라는 말을 남겼다. [2] 이 기사를 두고 공감하는 댓글과, 대표가 어떻게 저렇게 이야기할 수 있느냐는 댓글이 극명하게 갈렸다.
워라밸은 일(워크)과 삶(라이프)은 구분되어 있으며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가정한다. 반대로 워라밸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나는 내 일이 좋고 일과 삶의 명확한 경계가 없다' 이야기한다. 총 동기 이론을 기억하는가? 직접 동기(즐거움, 의미, 성장)를 가지고 일하는 사람은 워라밸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것이고, 간접 동기(사회적 압박감, 경제적 압박감, 타성)로 일하는 사람은 워라밸을 간절히 바라는 게 아닐까 싶다.
워라밸에 대한 논의에서 개인적으로 공감했던 것은 밸런스를 누가 정하느냐가 중요하다는 의견이었다. 일이 즐거운 사람은 오래 일하고도 만족할 것이고, 일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는 사람은 최대한 적게 일하는 대신 회사 밖에서 의미 있는 활동을 찾으려 할 것이다. 오래 일하더라도 그것이 본인의 선택이라면 문제 될 것이 없고, 직업 외 활동을 위해 일찍 퇴근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면 된다. 문제는 일이 즐겁지도 않고 의미도 찾을 수 없는데, 심지어 할 일을 다 마쳤는데도 상사 눈치 때문에 일찍 갈 수 없는 회사들이다. 위에서 언급한 케이스들처럼 내 시간이 낭비되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회사들 때문에 워라밸 논란이 끊이지 않는 듯싶다.
안타까운 것은 언론에서 워라밸 문제를 다룰 때 근무시간을 줄인다든지, 출근 시간을 자율로 한다든지, 사무실 강제 소등처럼 야근을 어렵게 만든다든지, 워라밸을 시간의 문제로만 프레임 한다는 것이다. 시간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면 아무리 근무시간을 줄여도 워라밸 문제는 사라지지 않는다. 15~20년 전만 해도 토요일 오전에 출근하는 것이 당연시되었지만 지금은 주 5일 근무하는 회사가 대부분이다. 배달의 민족을 운영하는 우아한 형제들이나 신세계는 아예 주 35시간만 근무한다. 주 30시간만 일하면 워라밸 논란이 없어질까?
시간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면 리더와 팀원 간에, 혹은 세대 간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 워라밸의 핵심은 시간 자체가 아니다. 시간을 밸런스 하는 주체의 문제다.
[1] World Health Organization, Global Status Report on Alcohol and Health, WHO
[2] “연봉 천만 원으로 인생 못 바꾸지만, 스타트업 경험은 인생을 바꾼다”, <한국경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