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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강 Sep 03. 2020

자두 할아버지와 들깨 할머니

들깨는 고소한 들기름으로 거듭났다


"학교 근처에 사시는 할아버지가 전화하셨는데 자두를 주신다네요."

학교 근처에 과수원이 있었던가· 궁금해하는데 다시 전화를 주셨다. 집에서 기른 자두를 아이들과 나눠먹고 싶은데 팔을 못 쓰니 직접 따러 사람을 보내줄 수 있느냐고 물으셨다. 주무관님은 풀을 깎고 계시고 선생님들은 모두 수업 중이시라 일손이 없다 하니 혼자 따 보시겠다고 했다.

상황이 안돼서 못 간다 해놓고도 자꾸만 생각이 났다. 자두 뭐 그건 안 먹으면 그만이지만 농약 한번 안치고 키운 거라 아이들 먹이고 싶다고 하시는 어르신의 마음을 몰라라 하는 것이 맘에 걸렸다. 지킴이 선생님을 앞세워 뜨거운 여름 속으로 학교 뒷길을 걸어 올라갔다.

노부부가 집 옆 작은 과수원에서 자두를 따고 계셨다. 나무 아래엔 더덕, 도라지, 황기 등의 약용식물을 심어둔 작은 친환경 텃밭 과수원이었다. 할아버지는 손목 수술을 하셨다며 깁스를 하셨고 할머니는 디스크가 있으신지 허리를 제대로 펴지 못하셨다. 한쪽 팔로 사다리를 놓고 자두를 따고 허리가 반쯤 굽어있는 몸으로 자두를 받아 담고 계시는 어르신들의 모습에 망설였던 내가 부끄러워졌다.

"자식들 다 나가 있고 두 노인네가 먹어봐야 얼마나 먹겠어요. 이래 봐도 흑자두가 달아요."

아슬아슬 사다리 위에서 자두 따는 손길이 바쁜 어르신의 사다리를 잡아드리기도 하고 손이 닿는 곳의 자두를 한 광주리 땄다.

"요건 8월에 익고 저건 9월 돼야 익으니까 그때 또 전화드리리다."

나눠주신 자두를 무겁게 들고 나오는데 남몰래 아이들을 생각해주시는 동네 어르신들의 마음을 들고 오는 것 같아 감사하고 따뜻했다.

모퉁이를 돌아 나오는데 할머니 한 분이 지킴이 선생님을 불러 세우신다.

"학교 들깨 모종이 다 죽었던데 이거 갖다 심어유."

감자를 캐고 난 학교 텃밭에 아이들과 들깨 모종을 심었는데 꼭꼭 누르지 않아서였는지 가물어서였는지 다 죽어버리고 얼마 남지 않았다. 사택 빈터에 심은 모종이 자라면 보식하려 했는데 할머니가 그걸 보셨나 보다. 어린 농부들의 어설픈 농사짓기 실력을 보고 어르신들은 직접 말은 못 하시고 저래 속앓이를 하시고 계시나 보다.

낑낑거리며 자두를 들고 후문에 들어서는데 마침 다모임 놀이동아리 친구들이 한참 놀이에 빠져 있었다. 새로 그린 전통놀이를 하느라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신나게 노는 모습이 예뻐서 잠시 바라보는데 아이들이 반갑게 손을 흔들며 뛰어왔다. 손에 자두 두어 개씩 쥐어주니 속까지 빨간 자두를 어쩔 줄 몰라하며 찡그리며 먹는 표정이 귀엽다. 온 얼굴로 할아버지의 사랑을 먹고 있는 것 같다.

다음날 지킴이 선생님과 주무관님이 어느새 모종을 옮겨 심어 놓으셨고 마침 내린 비로 금세 뿌리를 내려 텃밭엔 들깨가 무성하다. 아이들은 자기들이 심은 모종이 거의 다 죽은 것을 알라나 몰라. 애써 알리지도 말하지도 않았다. 더운 여름날 땀을 뻘뻘 흘리며 애쓴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는 것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가끔은 모른 척하는 것도 좋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아이들이 마을 축제에 가서 공연을 하고 할머니가 꽃씨를 갖다 주시고 아이들이 마을에 채송화를 심으니 이젠 또 할아버지가 자두를 주셨다. 학교가 마을 속에 있고 아이들이 마을에서 오는데 마치 동떨어진 다른 세계처럼 문 닫고 살지 않았나 싶다. 표현을 하지 않으셔서 그렇지 연결하는 길을 몰라서 그렇지 마을 분들도 학교의 아이들을 함께 키우고 계셨던 것이다.

내가 점점 마을에 정이 드는 것처럼 자두 할아버지와 들깨 할머니도 학교를 지나가실 때마다 아이들을 보며 더 흐뭇한 웃음을 웃으시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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