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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분쟁 중 시간이 멈춘 땅

그곳에 자연이 피어난다. 

by 인생은 꽃 Feb 02. 2025

 

집 근처에는 아주 오랫동안 공사가 진행되지 못한 큰 공터가 있습니다. 

아마 앞 건물의 조망권이나 일조권 등의 이유로 공사가 지연되다가 자연스럽게 공터가 되었을 텐데, 보통은 반투명한 차단막으로 크게 둘러져있어 내부가 잘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다 차단막 한쪽이 무슨 이유에선지 훼손되어 안쪽이 훤히 들여다 보인 적이 있습니다. 

아래 사진이 출근길 아침에 제가 느닷없이 보게 된 풍경입니다.

실제로는 훨씬 더 아름다웠던 억새밭실제로는 훨씬 더 아름다웠던 억새밭
주변의 인공물들을 지우고 나면, 영락없이 하늘공원 같다.주변의 인공물들을 지우고 나면, 영락없이 하늘공원 같다.

사진엔 잘 담기지 않았지만, 창백하게 비추는 겨울 아침해와 더불어 뭔가 감동적인 장면이었습니다. 마치 옷장 너머 나니아*를 엿본 것 같은 느낌이었죠. (이른 아침 출근길이어서 특히나 센치한? 상태여서 이런 생각까지 들었던 것 같긴 합니다.) 사람들의 분쟁 중 시간이 멈춘 땅에 기어이 찾아온 자연.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스스스하며 바람이 갈대에 스치는 소리도 들립니다. 주위의 분쟁 현수막과 사람들이 무심코 버린 쓰레기, 그리고 공사 철조망들과 겹쳐져 비현실적인 느낌이 드는데, 머릿속에서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지워내 보면 영락없이 처연한 억새숲입니다. 평소 울산 신불산의 억새 평원에 가보는 게 버킷리스트에 있을 정도인 저에겐 더더욱 와닿았습니다. 


한평 한 평의 땅에 값을 매겨 잡초를 뽑아내고 콘크리트 건물을 올리기 바쁜 이 도시에 이런 시간이 멈춘 땅이 있다는 건 놀라웠습니다. 누군가 공사가 진행되지 않아 골머리를 앓고 있는 동안 자연은 허락 없이 이곳에 입주해 뿌리를 내리고 계절마다 옷을 갈아입듯 모습을 바꾸고 있었습니다.  


상상이 되었습니다. 

추위가 가시고 날이 따뜻해지면, 바람결에 날아오고 새들이 버리고 간 씨앗들이 뿌리를 내려 이름 모를 들꽃들이 피어나겠죠. 인간의 손이 전혀 닿지 않았으니 자연의 계획대로 혹은 무계획대로 아무렇게나 자라나 어우러질 것입니다. 그게 인간의 모습에 예쁘던 그렇지 않던 자연은 신경 쓰지 않겠죠. 그저 무심히, 인간의 사정은 관심도 없다는 듯 경관을 이루어 낼 것입니다. 


그러다가 인간들이 정신을 차리고 극적 타결에 이르러 이 땅을 다시 콘크리트로 뒤덮게 되면, 자연은 또 자리를 빼앗기겠죠. 그럼 그런대로 또 뿌리를 내릴 어딘가를 향해 떠돌거나, 혹은 기다리며 세월을 견디게 될 겁니다. 


이사를 와서 그곳을 처음 발견했을 땐 이 노른자 땅이 이렇게 오랫동안 비어있다니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이 억새밭을 본 이후로는 지나갈 때마다 안쪽을  엿보곤 합니다. 이제는 다시 꼼꼼히 차단막이 세워져 있어 중간중간 구멍이 뚫린 곳으로 안을 들여다봐야 합니다. 조망권을 외치며 공사를 결사 반대했을 앞 건물 사람들은 지금 덤으로 계절마다 펼쳐지는 이 자연의 풍경을 1열에서 직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금 부러워지기도 합니다. 


겨울날 출근길에 마주친 도심 속 억새밭.

이 크지만 작은 자연의 공간이, 참 많은 걸 생각하게 합니다. 




* 나니아 - 루이스 캐롤의 나니아 연대기 - 사자와 마녀와 옷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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