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든 이야기가 담겨있다면

간판은 없지만 이야기는 있는 파란 카페 ; chiang mai, 2017

by SHUN

뭐든 이야기가 있는 것


선택은 늘 어렵다. 기준을 세워두지 않으면 머리가 아프다. 모양새도 가격도 성능도 중요하지만 내 기준은 조금 독특하다. 뭐든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물건을 살 때도, 음식을 먹을 때도, 사람을 만날 때도, 모든 경우에 적용된다. 우선순위의 가장 아래서부터 차례차례 지워나가다 보면 결국 남아있는 최우선 순위는 뭐든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연이 없는 사람은 재미가 없고, 얼굴만 잘난 사람은 매력이 없다. 모양만 그럴싸한 음식은 손이 가지 않고, 기능만 뛰어난 물건은 금방 질린다. 그러나 이야기가 담기면 얘기가 달라진다. 조금 못 생겨도, 조금 부족해도, 조금 맛이 없어도 시선이 가고 마음이 생긴다. 이야기의 힘이다.




여행과 선택


여행은 그야말로 선택의 연속이다. 사람들은 자주 인생을 여행에 비유하는데, 그 이유는 둘 다 선택의 굴레라는 점 때문인 것 같다. 인생에서의 선택은 대부분 커다란 결정 앞에 놓여 있을 때이지만, 여행에선 모든 사사로운 부분에 있어서 까지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모처럼의 기회, 다시는 없을 장소와 시간이라는 생각 때문일까, 당장 먹을 음식 메뉴 하나 고르는 데도 뭘 그리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는지. 그렇기에 이런 순간이 올 때마다 기준을 세워두지 않으면 머리가 아프다.


치앙마이를 선택한 이유는 이야기가 있는 곳 같아서였다. 무슨 이야기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곳이 뿜고 있는 에너지에서 느낄 수 있다. 치앙마이 chiang mai라는 이름, 세월이 느껴지는 낡은 사원들, 그리고 그 주위를 뒤덮은 다양한 초록빛의 식물들. 미소가 아름다운 타이 사람들에 뒤섞인 전 세계에서 온 여행자들. 아기자기한 카페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반짝이게 하는 뜨거운 햇살과 파랗다 못해 눈이 시린 하늘. 이야기가 있는 것은 스스로 빛을 낸다.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곳은 이야기를 가진 곳이란 걸. 이 도시에서 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보고 싶었다.




간판은 없지만 이야기는 있는 파란 카페


치앙마이에서 떠나기 이틀 전날 처음 들렀다 반해 마지막 날 또 찾았던 카페가 있다. 이름이 잘 기억이 나지 않아 일 년 전이라 잘 기억이 안 나나 싶었는데, 다시 그 카페의 사진을 찾아보니 간판이 없다. 간판이 없는 카페였던 것이다.


이 곳은 간판 말고도 없는 게 많았다. 에어컨이 없었고, 와이파이도 없고, 심지어 제대로 된 좌석도 없어 2층의 간이 의자에 앉아 땡볕에서 일 분만에 녹은 아이스커피와 케이크를 즐겨야 했다. 이 카페는 구조가 조금 독특했다. 적갈색 페인트가 칠해진 2층 건물 1층에 자리를 하고 있었는데, 그 내부는 커피를 내리는 곳으로 덩치가 좋은 주인장 한 명으로도 꽉 찰 정도로 좁아 보이는 공간이었다. 카페 외벽엔 파란 페인트가 칠해져 있었다. 그래서 내 기억 속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 카페의 이미지는 '파란 카페'다. 바로 옆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있는데 2층은 일반 가정집으로 보이는 문이 세 개 있었고, 그 앞으로 간이 의자와 테이블이 하나 놓여있었다. 커피를 만드는 좁은 공간에서 주인아저씨는 열심히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커피 머신은 따로 있지 않아, 전부 핸드드립으로 커피를 내리는 것 같아 보였다. 날이 더워서인지 아저씨는 이곳의 커피를 아이스로 즐기기를 권했다. 커피와 케이크를 들고 2층으로 올라가 앉으니 눈 앞엔 커다란 나뭇잎과 에메랄드색 지붕이, 아래층엔 좁고 한적한 치앙마이 거리가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도무지 편한 거라곤 하나 없는 곳이었다. 그런데 문득 내일은 몇 시에 오픈하나 찾아보고 있었다. 불편함이 주는 에너지가 마냥 불편하기보단 따뜻하게 다가왔다. 이곳은 이야기가 있는 곳이구나, 생각했다. 좋아한다는 건 이렇게나 갑자기다. 이 파란 카페가 좋아져 버렸다.


그곳에 앉아 콧방울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는지도 모르고 글을 썼다. 덥고 불편했지만 치앙마이에 온 이유가 이 때문이 아니었다 싶었다. 이야기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은 새로운 영감을 주기에. 이곳이 쌓아놓은 에너지는 괜한 것이 아님을 느끼며 오롯이 나의 시간에 집중했다. 내가 세운 선택의 기준이 틀리지 않았음에 흡족해하며, 나는 마지막 날도 이곳을 찾아 파란 카페의 이야기에 귀를 댔다. 콩콩 심장 소리가 들려왔고, 지는 해를 바라보며 이 소리를 잘 담아 마음의 서랍에 잘 넣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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