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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소한 May 26. 2024

안정형인 줄 알았는데 회피형이었을까

문제 상황에 직면하지 못했던 과거를 돌아보다

과거 연인과 함께 애착유형에 대한 심리테스트 결과를 나누던 때가 기억난다. '불안형이나 회피형이 나오면 어쩌지'하는 순간적인 생각을 했는데, 이는 내게는 물론 상대에게도 들었던 걱정이었던 것 같다. (아마 상대도 그렇지 않았을지) 다행히 우리 둘은 모두 안정형이라는 결과를 얻었고 나는 안도했다. 그것이 앞으로도 우리가 건강한 연애를 할 수 있다는 하나의 시그널 같았으니까. 하지만 어리석게도 간단한 심리테스트 결과에 의존할 만큼 인간은 단순하지 않다는 것 역시 알게되었다. 무의식적으로 안정형 결과를 이끌만한 답변만 쏙쏙 골랐을지 누가 알겠어? 그래도 관계에 있어 안정형이 아닐 거라는 생각은 해보지 않고 살았던 내게, 믿고 싶었던 그 프레임에 금이 가는 몇 가지 순간들이 찾아온 올해였다.


#1. 8년째 직속 상사와의 모먼트


앞선 글에서 언급했듯 나는 8년이라는 오랜 시간을 함께한 친밀하고도 대하기 어려운 상사가 있다. 갑자기 바뀌어버리는 그의 의견이나 결정사항에 따른 뒤처리들, 그 의견이나 결정들이 다소 감정적인 상황에서 전달된다는 , 그 감정적인 상황에서 드러나는 눈빛, 표정, 언행들이 공격적이다 싶을 만큼 느껴지게 만드는 나의 민감함, 그의 의견에 반기를 들고 싶거나 '그렇게 말하지 않았으면' 하는데도 내 마음이나 상태를 전달할 수 없는 성향에서 느꼈던 무력감, 그럼에도 업무 외 상황에서는 게 마음을 써주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는 나. 혼란할 대로 혼란해져 버린 감정과 상황이 뒤죽박죽 되는 순간마다 찾아오는 퇴사 갈망은 잊을만하면 나타나 나를 괴롭혔다.


조직이라는 환경의 특수성, 상사라는 포지션 관점에서 바라봤을 때 '내가 그에게 많은 것을 바라고 있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조직에는 의사결정권자가 반드시 필요하고, 그를 둘러싼 다변하는 상황과 내가 모르는 맥락 속에서 의견이 바뀔 수 밖에 없는 분명한 이유도 있을 것이다. 애자일(Agile)하게 일하고 빠르게 처리되어야 하는 비즈니스 상황 속에서 방향이 변경되는 이유를 나에게 하나하나 설명해 줄 시간도 그럴만한 이유도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다만 다급하게 전달되면서 놓칠 수밖에 없는 업무의 디테일과 감정적으로 전달되는 과정에서 무너져가는 신뢰와 서운한 감정은 어쩔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상사에게 느끼는 복합적인 감정을 지혜롭게 전달하지 못했다는 지점이 나를 가장 괴롭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에게만큼은 죽어도 싫은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으니까.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던 말 '당신 때문에 힘들어요'


올해 초 그 어느 때보다 강한 퇴사 욕구가 다가왔다. 이제 할 만큼 했다는 생각과 함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나고 싶었다. 연차도 찰만큼 찼겠다 이젠 정말 멈출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인간적으로 이쯤 되면 얘기할 것은 얘기하고 끝내야겠다는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불도저 마인드가 더해졌다. (한 방울만 더 떨어지면 넘칠 것 같은 인내심이라는 컵에, 한 방울이 떨어지는 순간이었나 보다) 늘 야근하는 그와 나 역시 잔업을 마무리하느라 퇴근이 늦어진 2월의 평일 저녁, "맥주 한잔 하실래요?" 하며 말을 건넸다.


두어 시간 정도 피자에 맥주를 먹으며 8년 동안 묵혀둔 이야기들을 차분하게 꺼냈다. 이런저런 이유로 같이 일하기가 힘들다고. 징징거림도 아닌 원망도 아닌 있는 그대로의 내 감정과 그렇게 느낀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이미 객관적으로 바라본 나의 기질적 성향에 따른 고충을 1월 말 회식자리에서 털어낸 적이 있었기에 이번 대화도 어렵거나 무겁지 않았다. 상사와 부하직원이 아닌 인간 대 인간의 대화를 했던 순간이 아닐까 생각한다.


내가 그에게 부탁한 것은 크게 두 가지였다. 피드백을 전달하는 상황에서는 가급적 화내면서 얘기하지 말아 주세요(특히 저와 같이 민감한 성향에게는 당신의 모든 비언어적 태도가 오히려 입을 꾹 닫게 될 만큼 굉장한 두려움을 줍니다), 다른 팀 등 여러 사람이 모여있는 회의 자리에서는 존칭을 사용해 주세요(회식이나 친한 사람들끼리 있을 때는 편하게 부르셔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고쳐야 할 점도 솔직하게 전달하고 약속했다. 비즈니스 상황에서 애매하거나 모호한 대화가 오갈 때 문제해결 관점에서 분명한 태도를 취하겠다고. 그와 나 사이에 갈등 상황이 생기면 지금까지처럼 넘어가지 않고 오늘 이 자리처럼 솔직하게 말씀드리겠다고. 초반에는 약간 놀란듯한 표정의 팀장님이었지만 비로소 나를 이해했다는 느낌도 받은 것 같았다. 그 이후 신기하게도 그와 더 허물없이 대화하고 일할 수 있게 되었다. 일에 대한 정보, 서로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는 횟수도 늘었다. 용기 내길 잘했다는 생각! 이제 조금은 속 편하게 일할 수 있지 않을까.


앞으로도 종종 맥주타임 신청할게요


#2. 십오년지기 친구들과의 모먼트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작년 말부터 지금까지 반대 성향에 가까운 친구들과 3박 이상의 여행을 하게 되었다. 나와는 다르게 생각에 깊이 빠지지 않고, 마냥 예쁜 감성보다는 실리를 강하게 추구하며, 좋은 말만 하기보다는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상황이면 싫은 소리도 담아두지 않고 해주는 편에 가까운 친구들이다. 제 앞가림 잘하고 집안일도 똑소리 나게 하는 야무진 친구들이라 그 부분은 잘 맞지만 각자가 하는 이런저런 생각들을 들어보면 '나랑 똑같은 생각 하네'보다는 '쟤는 저걸 저렇게 생각하네' 싶은 구석이 더 많은 그런 친구들. 십 대 시절부터 함께 했으니 벌써 20년에 가까운 인연을 자랑하는 그들과의 여행.


짧게는 하루하고 반나절, 길게는 3일을 붙어서 지내다 보니 잠깐 만날 때와 비교했을 때보다 서운한 생각이 드는 순간도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공교롭게도 두 친구 모두 나보다 운전 경험이 많다 보니 생초보 운전자에게 이런저런 피드백을 줄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격려나 칭찬 없이 피드백하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며칠째 듣고 있자니 마음이 편치 않고 옆에 태우는 것 자체가 부담이 되기 시작했다. 물론 아직 좋은 소리 못 들을만한 운전실력인걸 스스로 잘 알고 있지만 계속해서 날아드는 이런저런 의견들에 움츠러들고 예민하게 구는 건 아직 나도 고치지 못했다고! 그런 불편한 감정인 상태로 여행을 끝낸 것이 아직도 꽤나 마음에 걸린다.


어떤 일이 있건 속마음을 잘 이야기하는 나와는 달리, 본인들이 힘들고 어려운 일에 대해서는 웬만하면 터놓지 않는 친구들이기에 그 부분은 나도 항상 어려움이 있었다. 나는 어려움을 나누면 반이 된다고 생각하지만, 이 친구들은 어려움을 나누면 그대로 2배가 된다고 생각하는 친구들이기 때문인 것 같다. 15년 이상을 연락하고 지냈지만 서로에 대한 솔직한 감정은 뒤로 하고 좋은 것, 편한 것만 유지해 왔던 사이기에 우리는 아직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다.


운전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뻔한 연예인 얘기나 관광지 얘기 말고 진짜 우리 얘기를 했으면 어땠을까? "운전에 대해서 이런저런 거 알려줘서 고마워. 근데 나는 채찍보다 당근이 더 통하는 스타일인 거 몰랐지?ㅎㅎ 네가 하나하나 얘기해 줄 때마다 뭔가 작아지는 느낌이 들더라고. 그래도 몰랐던걸 알려주는 건 좋아. 움츠러드는 건 내가 고치도록 해볼게, 너도 이런 내 성향을 감안해서 말해주면 좋을 것 같아!"


친구야, 무슨 생각하니? 우린 더 솔직해질 필요가 있어


그렇지만 이 친구들은 나와 다른 만큼 내가 보지 못했던 부분을 봐주는 친구들이다. 남들의 생각에 공감하기가 어렵다는 친구 A는 일단은 거의 무조건적인 공감을 보내는 내 모습을 보며 이런 건 좀 배우고 싶다고 한다. 반대로 나는 순간적인 돌발 상황에서 허둥대거나 쩔쩔매지 않고 금세 침착함을 되찾고 별일 아니라는 듯 웃어넘기는 친구의 모습에서 배울 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운전 중 작은 실수에도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스스로에게 아쉬워하는 내 모습을 본 친구 B는 '그건 네가 너무 잘하려고만 해서인 거 같아'라고 정확하게 포인트를 짚어주었다. 만약 내 감정을 먼저 생각해서 내가 서운할까 봐 말하지 않는 나 같은 친구였다면 나는 아마 그 부분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다른 만큼 서로가 서로에게 배울 수 있다.


초연하자. 초월하자.


나와 가까운 사람들 속에 있는 내 모습에서 느낀 것이 있다면, 아직 나는 나와 결이 다른 사람과의 문제를 적절히 처리하는데 익숙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점이다. 직속 상사에게는 8년째 나의 진심을 숨기고 적당히 가면을 쓰다가 올해가 되어서야 속내를 털어놓기 시작했고, 친한 친구들에게 가끔 느끼는 나의 불편한 감정을 그때그때 이야기 하지 못한 상황이다. 속은 아프지만, 괜찮다고 기분 상한 거 아니라고 이야기하면서. 그렇지만 나와 비슷한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 아마도 손에 꼽을 만큼 적을 테고 다르게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태반일 텐데, 이 부분은 냉정하게 받아들일 부분은 빠르게 받아들이고 어느 정도는 솔직하게 털어놓고 싶다. '당신이 이렇게 행동하고 말했을 때 솔직히 이런 감정이었습니다'라고. 자의식이 너무 강해서 다른 사람이 바라보는 나'를 신경 쓰는 것이 아닌 '있는 자체의 나' 그대로 편안하게 생활하고 싶다. 내가 나에게 편안해져야 남들에게도 편안해진다고 하니까.


당장 바뀔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인식을 마쳤고 어느 정도는 행동에 옮겼으니 조금 더 과감하게 행동해 보기로 한다. 몇 번 보고 말 사이도 아닌, 나와 어쩌면 평생 인연을 이어갈 사람이니 더욱더 부딪혀야 한다. 상대를 위해서이기도 하고 그를 상대하는 나를 위해서이기도 하다. 더 이상 그 사람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다는 마음 때문에 상대에게 느낀 불편한 마음까지 내 몫으로 가져오지 말자. 이미 받은 상처는 잘 아물게 연고를 발라주고, 앞으로 같은 상처가 새로 생기지 않게끔 나에게 더 솔직해질 것이다. 제주에서 서울로 돌아가서 친구들을 다시 만나게 되면 용기 내서 꼭 이야기해 봐야겠다. 민망하지만 너랑 더 잘 지내고 싶어서 이런 이야기를 굳이 하는 거야,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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