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허 취득 4년 만에 운전대를 잡아봅니다
사실 내 일상 반경에는 운전이 필요하지 않다. 대중교통을 이용한 출퇴근은 Door to door로 30분이 걸리고, 수도권 중에서도 생활반경이 넓지 않은 서울에 살고 있으며, 여행을 할 때에도 골목 구석구석을 누빌 수 있는 뚜벅이 여행을 선호하니 항상 그렇게 해왔다. 운전을 반드시 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이는 것도 1년 중 세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다. 그 역시 이케아를 간다던지, 꽃시장을 간다던지, 멀지 않은 근교로 나들이를 간다던지 하는 아주 소박한 수준에 그친다. 근데 면허는 왜 취득했냐고? 그냥 남들 다 하는 거라 도전해 본 건데 이렇게나 소질이 없을 줄은 몰랐다. 수년간 들인 수강료가 너무 아까웠고, 별로 꼿꼿하지도 않은 내 자존심이 도저히 이것만은 중도포기를 허락하지 않아서 울며 겨자 먹기로 땄다. (내 인생에 있어 기능시험을 준비하던 기간은 역대급으로 자존감이 내려가는 시기였다.)
그래도 면허가 있으니 언젠가는 운전하게 되겠지 뭐, 하는 안일한 생각만 3년째 하고 있던 2023년. 이젠 정말 해봐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게 된 몇 가지 작은 계기가 있었다. 일단 5월. 4시간가량을 운전해서 경남에 내려가야 하는 가족여행 일정이 생겼고, 나는 조수석에 앉아 열심히 조수 노릇을 했다. 운전경력이 많은 친척언니가 운전을 책임졌지만 이 나이 먹고 조수석에만 앉아있기가 너무 미안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내비를 함께 봐주는 것과 언니의 간식을 챙겨주는 도우미 역할뿐. 2시간씩 나눠서 운전했으면 언니도 좀 덜 피로하고 내 마음도 한결 편했을 텐데, 하며 아쉬워했던 경험.
다음은 12월. 4살 배기 조카를 데리고 키즈카페에서 반나절을 보내야 하는 미션에 자원했다. 키즈카페로 가는 길은 버스를,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택시를 이용했는데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린 시간이 추웠는지 조카가 감기에 걸려버린 것이었다. 운전 못하는 고모를 둔 조카가 안쓰럽고, 나 스스도 기분이 별로였다. 그리고 마지막은 친구와 함께 떠난 2박 3일 제주여행. 초보운전이지만 그래도 곧 잘하는 친구가 3일 내내 운전대를 잡고 제주를 가이드해 주었다. 카페에서 휴식할 때마다 테이블에 지쳐 쓰러진 친구의 모습을 봤을 때, 빗길 운전에서 김서림방지를 위한 버튼을 대신 눌러주지 못했던 내 모습을 봤을 때. '이제 도저히 마음이 불편해서 안 되겠다. 진짜 때가 됐구나!' 싶어 올해 1분기 끝자락에 8시간의 운전연수를 신청했다.
운전연수는 총 4일간 진행됐으며 지인 분께서 연수 받았던 선생님께 개인적으로 연락을 드려 성사되었다. 첫날은 집과 회사 등 친숙한 장소 돌기, 둘째 날은 고속도로 타고 교외로 나가기, 셋째 날은 핸들링 연습을 위한 북악스카이웨이 방문, 마지막 날은 동네에서 주차연습을 진행했다. 일반도로와 고속도로를 모두 경험했고 초보자에게 필요한 기초 스킬을 위한 커리큘럼으로 짜여있어서 나름 만족스러웠다. 긴장 상황이기에 100% 흡수는 어려웠지만 실시간으로 필요한 정보나 팁을 전수해 주셨고, 운전 별거 아니라는 마음가짐을 심어주신 점이 도움이 되었다. 마지막 날에 선생님 차를 세게 긁었는데 그건 너무나 죄송한 마음..
운전연수를 진행하던 열흘 정도의 기간 동안 갑자기 제주로의 한달살이 계획이 추가되었고, 운전을 배우고 있는 김에 제주에서 실전 운전에 돌입해야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자연스럽게 전환되었다. 연수가 끝난 3월 말. 5월에 렌트할 차량과 동일한 차량으로 4월에도 운전 연습이 필요하지 않겠냐는 지인의 조언에 예정에 없던 2번의 차량 렌트를 준비하게 되었고 총 6일간 광명, 양재, 시흥, 신논현, 남양주, 양평 등으로 코스를 확장하며 운전연수 복습 겸 혼자 운전하기를 시뮬레이션했다. (앞선 3일은 기아 모닝, 뒤 3일은 현대 아반떼 신차급으로 연습을 진행했다)
처음으로 혼자 운전하던 날에는 이케아 광명점을 가기로 한 일정이었다. 렌터카 픽업장소(주차장)에서 마음의 준비를 하고 빠져나가는 데만 1시간 30분이 걸렸다. 주차연습이 미숙해서 자체 연습을 한 것도 있지만, 혼자 도로에 나가는 것이 난생처음이었기에 두려움이 엄청났다. 하필 주차장에서 빠져나온 직후 비보호 표지판을 만나서 엄청나게 큰 소리의 클락션을 맞아야 했지만, 하루와 이틀을 지나 3일째 아무 사고 없이 운전을 마무리한 날에는 인생에서 손에 꼽을 만큼의 보람과 벅찬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짐을 이고 지고 지하철에 탑승하지 않아도 되고, 시외로 나갈 때 더 이상 빨간색 좌석버스를 목이 빠져라 기다리지 않아도 되며, 차가 없으면 닿을 수 없는 경기 외곽으로의 나들이 등을 이제는 내가 가고 싶을 때 다녀올 수 있다는 기동력이 무한한 자유로움과 가능성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물론 도로에 나선다는 엄청난 심적 부담감과 맞바꾼 몫이다.)
현재 제주에서 렌트를 시작한 지 2주가 되어간다. 하루도 빠짐없이 짧으면 20분, 길게는 3시간 가까이 운전을 한 결과 제주시에서 서귀포시까지 차량으로 넘나들 수 있게 되었으며, 일반도로든 해안도로든 산길이든 구애받지 않고 달릴 수 있고, 후진주차와 전면주차와 평행주차, 갓길주차를 여러 번씩 경험하면서 주차에 대한 감을 축적하고 있다. 차량이 마구 쏟아지며 눈치싸움하는 주차장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남은 자리에 주차를 할 수 있게 되는 침착함도 생겼다. 가장 큰 변화는 이제 행선지가 정해졌을 때 안전벨트를 하고 내비를 찍은 뒤 '망설임과 심호흡 없이' 바로 출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네 인생의 운전자는 너고
부모는 조수석에 앉은 사람들이야.
아무리 엄마가 중간에 내렸어도,
그리고 아빠가 옆에서 아무리 시끄럽게
방해를 해도, 운전대를 절대 놓치지 말고
네가 원하는 목적지까지
네 힘으로 가야 돼.
<남이 될 수 있을까>라는 드라마에서 위와 같은 대사가 나오는데 매우 공감했다. 운전을 하며 내가 얻게 된 가장 큰 깨달음은 '인생도 바로 운전과 같다'는 것이었다. 내비를 찍는 것은 인생의 방향성을 설정하는 것과 같고, 핸들을 잡고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은 새로운 목표를 위한 발걸음을 떼는 것과 마찬가지다. 길도 내가 찾고, 운전에 필요한 각종 보조장치들도 내가 컨트롤하고(물론 가끔은 옆에 있는 사람이 도움을 주기도 한다), 실수를 하고 사고를 만드는 것도 나의 몫이며 그것을 인정하고 책임지는 것 또한 누군가 대신할 수 없다. 길을 잘못 들어 가끔 더 긴 길로 돌아가더라도 중간에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목적지에는 어떻게든 반드시 도착한다.
내가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 내밀하게 찾아가는 과정 속에서 운전법을 터득하게 된 것은 굉장한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손과 등이 축축하게 젖어갈 만큼 긴장하는 나날의 연속이지만 어떤 경험보다도 더 빠르고 투명하게 나와 내 인생을 찾아가는 과정임을 체득할 수 있었다. 렌트를 하고 나서 바로 다음 날 차 오른쪽 옆구리를 세게 긁기는 했지만, 그래도 물건을 파손시키거나 사람을 해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이냐고 생각할 수 있게 하는 마음가짐과 매번의 운전이 끝나면 '정말 잘 왔어, 고생했어, 진짜 잘했다'라고 스스로를 칭찬해 주는 나로 변했으니까. 내일의 행선지는 또 어디일지, 가면서 무슨 일이 생길지 궁금해지는 하루하루처럼 앞으로의 내 인생도 이렇게나 기대되는 적절한 긴장감으로 채워나가야겠다.
기능시험을 6번 떨어지더라도, 길치에 방향치에 공간지각능력이 최하더라도. 운전,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