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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소한 May 12. 2024

부동산 그룹임장하며 바닥난 자존감

뿅망치로 얻어맞아 고개를 내밀기 무서운 두더지가 되다

비교적 최근에 친해진 지인들은 나를 굉장히 이성적인 사람으로 봐주는 게 참 신기하다. MBTI로 따지면 S(구체적이고 사실적인 정보 선호)나 T(논리적이고 객관적인 원칙 중시)로 오해하는 사람들도 생길 정도이니, 부동산 공부를 시작하기 전과 후의 내 모습이 많이 달라지긴 했나 보다. 부동산 공부에 한창일 때는 지극히 현실적인 태도와 생각을 기반으로 살아가게 되면서, 지인들과의 마냥 감성적인 자리가 '시간낭비'라는 생각까지 들어서 스스로에게 화들짝 놀랐던 경험도 있다. (사람이 이렇게 바뀔 수가!)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추상적인 감상에 빠지길 좋아하는 사람이다. 첫 부동산 정규강의가 끝난 후 3개월 정도를 셀프 학습의 시간으로 보낸 뒤, 다시 두 번째 정규강의를 신청했다. 이번에는 실전투자를 위해 좀 더 깊숙이 배워보는 과정이라 같이 하게 된 조원들 역시 나름 베테랑이거나, 다른 부동산 강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첫 강의는 기초반이었기에 나를 포함한 대부분이 부린이 수준이었다) 그들과 함께 임장에 나섰던 무더웠던 7월, 유독 더위에 취약한 나는 나도 모르게 스스로에 대한 불확신이 조금씩 쌓여가고 있었다.


임장 : 부동산을 사려고 할 때 직접 해당 지역에 가서 탐방하는 것


나를 수렁에 빠뜨린 사소한 고민들


첫째, 이 아파트 단지의 외관이 얼마나 좋은건지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보도블록이 어떻고 쓰인 자재가 어떻고. 같이 임장을 간 조원들은 너도 나도 한 마디씩 단지에 대한 평가를 던졌다. 아주 어릴 적 말고는 아파트에 살아본 적 없던 나로서는 잘 정비된 보도블록과 고급 자재의 기준이 모호했다. (물론 객관적으로 딱 봐도 좋아 보이는 것들은 제외하고 '좋은 편에 속한다는 것'을 디테일하게 모르겠다는 얘기다) 아파트를 살아봤거나, 살고 있거나 하는 사람들 속에서 괜히 남들은 다 가진 무기가 나한테만 없는 것 같은 기분에 살짝 움츠러들었다.


둘째, 아무리 이성적 렌즈를 탑재했다고 하지만 N(추상적이고 상징적인 정보 선호)은 N이었다. 유독 S들로 가득했던 조원들 사이에서 내가 무심코 던지는 한마디들은 너무나도 감상적이었다. "이 아파트 이름 ㅇㅇ이잖아요. 뭔가 예전 역사에 나오는 ㅇㅇ이라는 지명이 떠오르지 않나요?"라는 내 한마디에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는 조원들. "조장님(당시 나는 역시나 조장을 자원했다)은 보는 관점이 남다른 것 같아요. 저는 그런 생각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것 같은데." 물론 선의가 담긴 이야기였지만, 갑자기 마음이 쿡 쑤셔지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발동하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하는 N의 모먼트는 적어도 부동산을 임장하는 애티튜드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 확실했다.


셋째, 다른 사람들은 다 있는 것 같은 선호도가 나만 없는 것 같았다. 각자의 상황에 따라 어떤 단지가 제일 살고 싶은지, 어떤 방식의 투자를 할지 대화를 나누는 데 있어 의욕적으로 참여하기가 힘들었다. 이제 부동산 공부를 시작한 지 3개월 차. 배우고자 하는 향상심만 따지면 누구에 뒤지지는 않지만 그래도 수억이 왔다 갔다 하는 부동산 투자판에서 나의 결정 기준이 모호한 상황이었으니, 남들 말이 다 맞고 나는 어쭙잖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저는 지금 이러이러한 집에서 살고 있는데요. 이러이러한 이유로 이 아파트 단지가 최적이라고 느껴요. 다른 선택지는 저에게 어려울 것 같아요."라고 당당하게 소신을 밝히는 조원분이 그렇게 멋져 보일 수 없었다. 왜 이렇게 나는 자꾸 움츠러드는 것일까?


그 외에도 별거 아니지만 나에게는 중요한 (그리고 좀 부끄러운) 이유가 두 가지 더 있다면. 무더위에 햇빛을 피하는 요령을 몰라 옷가지를 잘 챙기지 못했다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피부가 결국 보기 싫게 타버렸던 게 하나, 조원 중 친해지고 싶은 분이 있었는데 왠지 그 앞에서는 더 뚝딱이가 되어서 점점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던 게 그 다음이었다. 조장으로서도 동료로서도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은데, 유독 그에게는 '지나가는 행인 1'로 인식되는 것에 자존심이 상했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이런저런 이유들로 나에게 작년 7월은 매우 고통스러운 달이었다.


타인과 비교하기 시작하며 스스로 쪼그라들어버린 나


지나 보니 그렇더라고요


두더지 잡기 게임 속 자꾸 두들겨 맞기만 하는 두더지가 된 마냥 서럽기만 했던 7월. 부정적인 생각의 꼬리를 바로 끊어내고 싶었지만 어째서인지 7월이 끝나고 8월이 지나도 이 바보 같은 기분은 계속되기만 했다. 선선한 가을이 시작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기분은 다시 정상 게이지로 차올랐고, 지금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 돌이켜보면 나라는 두더지를 내리쳤던 뿅망치의 주인은 다름 아닌 바로 나 자신이었다. 잘 모르지만 배우려고 시작했으면서, 어느새 잘하고 싶은 마음에 생겨버린 나의 조급함이 나를 갉아먹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멘토들의 조언을 스크린샷 해놓은 사진들을 다시 보고 다시금 반성하게 되었다.


남들만큼 잘하지도, 뛰어나지도 않지만
절대 포기하지는 않겠다는 마음가짐으로 하세요.

남들과 비교하지 마세요.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상황이 있습니다.
남들이 가진 것과 비교하기 시작하면 힘들어서 못합니다.



당시에 가장 필요한 말이었는데 그땐 왜 눈에 안 들어왔을까? 아마 이런 외부의 말을 받아들일 여력도 없이 지쳐있었나 보다. 생각해 보면 수준이 다른 사람들과의 임장활동이라는 것은 나에게 새로운 자극 그 자체였다. 그 자극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지, 부정적으로 받아들일지는 전적으로 나의 몫이며 나는 아쉽게도 후자 방향으로 매몰되어 있었던 것이다. '동료들이 부동산을 바라보는 시각을 많이 배우세요.'라는 멘토의 조언이 무색할 만큼. 만약 내가 그 동료들과 임장을 하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과 나의 생각 차이를 이렇게 강렬하게 느낄 수 있었을까? 사람은 사람 속에서 성장한다는 말에 나는 공감한다. 작은 자극에도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기반이 스스로 마련되어 있다는 전제 하에서. 나는 그 기반을 계속 다져야 한다.


지금은 연락이 닿지 않는 그때 그 동료들은 각자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목표했던 투자를 실행에 옮긴 사람은 있을까? 아니면 부동산 아닌 다른 가능성에 눈을 뜨고 정신없는 일상을 보내고 있을까. 다양한 나이대, 각자 다른 상황 속에서 서로에게 여러 가지 색깔의 자극을 선사했던 사람들의 근황이 갑자기 궁금해진다. 그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나는 '활기찬 것 같긴 한데 어딘가 모르게 힘들어 보였던 조장'으로 기억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 시점의 나는 그런 모습이었던 것을 인정하고, 다음에 만나게 된다면 한 단계 성숙해진 모습으로 기분 좋게 서로의 안부를 물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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