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소한 Jun 02. 2024

나를 사랑하기? 죽어도 못하겠던데요

거울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게 되기까지

매일 수시로 들여다보던 거울을 마주하기가 너무도 두려운 시절이 있다. 내 얼굴을 바라보면 흠만 보인다. 그렇게 좋아하던 일상 코디도 이때만큼은 예외다. 평소에는 절대 용납하지 않던 오늘 입었던 옷 내일 또 입기는 계속 반복되고 메이크업도 머리 손질도 가장 최소한으로만. 기억을 더듬어보면 그리 오래된 일도 아니다. 올해가 시작된 지 두 달쯤 됐을 때였나? 출근 준비를 겨우 마치고 지하철에 몸을 실어 그 짧은 회사 복도를 거닐 때까지 사람들과 도저히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바라보는 내 모습이 너무 싫었고, 그러니 누군가 나를 바라보는 것조차도 고역에 가까웠던 시간들. 적어도 1년에 한 번씩은 만나게 되는 시즌이고, 그때마다 나의 자존감은 바닥을 치다 못해 지하에 땅굴을 파고 들어가서 햇빛을 찾아보기 힘들 지경이다.


이렇게까지 멘탈이 무너지는 데에는 나름의 과정이 있다. 일단은 회사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한 번씩 생긴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머리로는 알지만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 일에서 상당히 큰 동기부여를 얻는 나이기에 회사에서 트러블이 생기면 회사에 몸담는 8시간뿐만 아니라 일상 자체가 힘들어 진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생각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에너지마저도 없다.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싶지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나뿐임을 스스로 잘 알고 있다. 힘든 마음이 전염될까 봐, 그리고 이렇게까지 죽상인 내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은 일말의 자존심에 혼자만의 식사를 자처한다. 퇴근 후 누리는 3~4시간가량은 모두 유튜브를 보는 데에만 할애한다. 우울감과 극복에 대해 이야기하는 콘텐츠들을 무지성으로 보면서 어떻게 하면 이 끊임없는 부정적인 생각의 고리를 끊을 수 있을지 내게 맞는 메시지 찾기에 집중한다.



나의 단점부터 제대로 바라보자


하루는 현실을 살아가는 이상주의자가 말하는 '나의 단점' 콘텐츠를 보며 힌트를 얻어보려고 했다.


스스로에 대한 단점은 도무지 생각할 기회가 많지 않습니다.
주변 사람들 역시 나의 단점에 대해서는 잘 이야기하지 않거든요.
스스로 끄집어낸 내 단점과 인사하기도 참 애매합니다.
이게 뭐 좋은 거라고 자꾸 꺼내게 되겠습니까?
하지만 나의 단점을 알게 되어 좋은 점이 하나 있다면
'발전하고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죠.

내가 가지고 있는 너무나도 근본적인 단점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때였다. (바로 앞선 글에서 소개한) 내게 닥친 문제상황을 무의식적으로 회피하고 있었다는 것. '내가 이렇게나 별로인 사람이었다고?'를 인정하는데 꽤나 시간을 쏟았고, 스스로에게 실망했던 인생의 순간들 중 손에 꼽는 모먼트였다. 회사 일을 하다 인지하게 된 단점이라 그런지 그 여파가 생각보다 오래갔고, 회사일 + 치명적 단점 + 그 외 사소하게 내 신경을 긁는 것들이 더해지니 나의 단점에만 매몰되게 되면서 부정적인 생각의 고리를 끊을 수가 없었다. 지나치게 타인을 의식하는 기질이 있다는 것도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었고, 그러다 보니 너무 많은 것들을 처음부터 잘하려고만 했던 말도 안 되는 욕심을 부리면서 인생을 살아왔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단점을 관리하는 방법에는 3가지가 있습니다.
무시한다, 보완한다, 장점화한다.
아이폰의 단점이 아이폰을 대변하지 않듯이
나의 단점이 내가 누구인가를 결정짓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대표적인 단점 3가지를 어떻게 관리할 수 있을까? 일단 문제를 회피하는 단점은 무조건 보완하기로 했다. 문제인식은 마쳤으니 무조건 정면 돌파를 하는 연습을 하고 있다. 나를 힘들게 했던 상사와는 자리를 만들어 솔직한 대화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으며, 10년 이상 실행에 옮기지 않아 나의 마음을 무겁게 했던 운전도 연수를 시작으로 직접 해보고 있는 요즘이다. 해야 하고 움직여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하지 않아서 괴로운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앞으로는 해보지도 않고 걱정만 하는 것은 내 사전에 없게끔 만들어야지.


부정적인 생각의 고리를 끊을 수 없는 단점은 어느 정도 무시(인정)하면서 보완하기로 했다. 이 단점은 일상적으로 식별되기보다는 내가 멘탈이 한없이 약해져 있을 때만 찾아오는 고질병이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행복으로 가득 차 있어서, 세상을 대부분 긍정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일단 멘탈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지 않도록 부정적인 시그널이 감지되면 나를 행복하고 안정적으로 만들어주는 장소에 찾아가는 것을 루틴으로 해보려고 한다.


내 지도 앱 속 loving place라는 이름의 폴더에는 약 70여 개의 장소가 등록되어 있는데, 이름 그대로 언제 찾아도 늘 나에게 만족감을 주는 방앗간 같은 장소들이다. 공원, 도서관, 박물관, 각종 상점, 카페, 맛집 등 성격도 다양하다. 이 리스트부터 다녀보기 시작한다면 나에게 조금은 선물 같은 시간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보며, 돌아오는 다음 우울 시즌에는 이걸 실천해 봐야겠다. (그치만 오지 않기를 강하게 바래본다)


타인의 눈을 지나치게 의식하여 너무 많은 것들을 잘하고 싶은 마음은 장점화 해보려고 한다. 스스로에게 조금 가혹할 때가 있지만 남들에게 피해를 주기보다는 긍정적인 효과가 더 크기에, 내가 가진 능력치 중에 하나로 쿨하게 인정하기로 했다. 희한하게도 단점이라는 것들 중에는 인식 그 자체로 해결이 시작되는 것도 있는 것 같다. 내가 타인의 눈을 지나치게 의식한다는 것을 스스로 인지하자, 의식적으로 그렇지 않으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곳에서 조금 편한 자세로 릴랙스 하게 행동한다던지 하는 작은 노력들을 시작했다. 절대 처음부터 모든 걸 잘할 수 없다는 인식도 의식적으로 스스로에게 계속 상기시키고 있고 말이다. '이것도 못했네, 저것도 못했네' 하며 자책할 시간에 크고 작은 칭찬들로 나 스스로를 칭찬 감옥에 가둬버려야지!



제주 여행 중 만난 아름다운 수집일기


제주 애월책방 '이다'에서 많은 책들이 마음속에 들어왔지만 가장 만족감을 주었던 책은 이화정 작가님의 <아름다움 수집일기>였다. 책을 읽으면서 수집했던 문장들이 오늘의 주제에 딱인 것들이 많아 소개하고 싶다.

종잡을 수 없고 헷갈리는 나를 스스로 견디기 어려울 때 내 사진을 들여다본다. 내가 좋아하는 나, 따뜻해 보이는 나, 삶을 긍정하고 나를 믿는 표정의 나를 열심히 찾아본다. 웃는 내 모습을 봐야 할 때를 대비해서 공들여 화장한 날이나 마음에 드는 옷을 입고 외출하기 전에는 셀카를 찍어둔다.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나와 눈을 맞추고 환하게 따라 웃는다. 내가 나를 예뻐해 준다. 그래야 그런 나를 남들도 귀하게 봐줄 테니까.


작가이자 책으로 삶을 가꾸는 북코디네이터로 활동하고 계시는 이화정 작가님에게서도 나를 사랑하는 팁을 배울 수 있었다. 나의 다양한 표정을 사진으로 남겨두었다가 종종 꺼내보는 것. 이 방법은 나를 사랑하는 것의 초급 과정을 지나 중급자 레벨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미 내 사진첩 속에도 옅게 미소 짓고 있거나 활짝 웃고 있는 사진들이 있지만 어딘가 모르게 낯설게 느껴지는 사진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은 의식적으로 웃으려고 한다. 몇 년 전에도 시도했던 연습이긴 한데 꾸준히 하기가 어려웠다. 민낯 상태에서도, 메이크업을 하는 중간에도, 무의식적으로 집중하고 있다가도 광대와 입꼬리를 올려 웃는 표정을 만든다. 억지로라도 웃어서 이 표정이 그대로 자연스러운 근육으로 굳어지게 하기 위해서. 무표정보다 웃는 것이 훨씬 자연스러워지기 위해서. 재미있는 예능을 보면서도 항상 건조하게 봤었는데, 의식적으로 소리 내어 웃으려고 노력한다. 소리를 내고, 얼굴 근육을 쓰고, 웃긴 표정을 지으면서 내게도 수시로 엔도르핀이 감돌도록!

여행하는 동안은 최대한 나에게 다정히 굴어야 한다. 남의 기분을 맞춰주느라 정작 나에게는 소홀했던 나를 데리고 다니며 좋은 풍경을 보여줘야 한다. 철저히 내 위주로, 최대한 이기적으로. 다음 달 생활비쯤은 모른척해도 된다. 타인의 말에 귀 기울이느라 정작 내 안의 목소리는 지나쳤던 시간들에 일일이 사과해야 한다. '늦었지만 이제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 잘 구슬리며 말을 걸어야 한다. 갑자기 화를 내도 무조건 다 받아주고, 눈물샘이 폭발하면 등을 숙이고 두 손으로 가슴을 살며시 감싸 안아 주어야 한다. 마음을 다해 나에게 친절해야 한다. 여행은 나를 만나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시간이다.


책에서 가장 좋았던 문장들이다. 제주로 내려와 한달살이를 시작한 초입에 만났던 문장이라 더 좋았다. 사려니숲길, 윤슬이 반짝이던 함덕해수욕장, 다랑쉬오름, 노을이 지는 이호테우해변 등 아름다운 풍경을 나에게 보여주려고 열심히 운전했고, 운전하다가 크고 작은 실수를 하는 순간에도 '그래도 괜찮아, 이 정도면 잘한 거야'하고 스스로에게 무한한 격려를 보내주고. 아기자기한 소품을 파는 상점에서 마음에 들어 눈에 밟히는 것이 있으면 '나에게 선물하는' 타이밍을 갖기도 하고. 노을을 바라보며 또 무한한 공상에 빠질 때는 '오늘은 또 이런 생각을 하는구나, 나름대로 멋진 생각이긴 해.'하고 집중해 보기도 하는. 나를 아껴주는 것에 있는 대로 몰입했던 한 달이었고 덕분에 나에 대해 몰랐던 새로운 사실들도 몇 가지 알게 되었다.


이 문장을 마음에 담아두고 실천해 보면서 느낀 점은 '내가 그동안 어느 정도는 나를 사랑하고 있었구나?' 하는 마음이었다. 평상시 스스로에게 가혹할 만큼 더 잘해야 한다고 몰아붙이는 편이라 빈도수가 적어서 그렇지, 내가 피로하고 지치고 힘들었을 때 내가 좋아하는 장소들과 사람을 본능적으로 찾으면서 그 안에서 새로운 위안을 발견하려고 했었던 노력들이 모두 나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왔던 행동들이라는 것이라고 새삼 생각할 수 있었다. 제주에 와서는 그걸 더 깊이감 있게 실천했다고 해야 할까? 안 그래도 혼자 떠난 여행이라 외롭고 심심하니 나라도 나를 사랑하는데 집중할 수밖에 없는, LOVE MYSELF 정신을 배우는데 최적화된 한 달이었다 싶어 다행이다.



나를 사랑한다는 거, 이제 조금 알 것 같아요


우리는 티끌같이 작은 푸른 별 지구에서
소립자의 삶을 살다 다시 언젠가는 본향으로 돌아가야 한다.
별은 우리의 고향이다. 인간의 삶은 우주의 별만큼이나 다양하고
모든 인간에게 있어 자신의 삶은 우주 전체와도 같다.
또 인간은 하나의 별이기도 하다.
- 오석훈 작가 -


제주에서 본격적으로 운전을 하면서 자주 쓰지 않던 안경을 매일 같이 쓰게 되었다. 다소 화려한 골드 프레임에 포인트 컬러는 강렬한 레드, 흔하지 않은 육각형 모양의 알을 가진 내 안경이 너무 유니크하고 과하게만 느껴졌다. '서울 가면 좀 클리어한 테의 무난한 안경으로 바꿔야겠다'라고 여행 내내 생각할 정도로 말이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고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다시금 알게 되며 '내가 좋아하는 건 이거고, 특히 이런 건 정말 오래 유지되고 있는 취향이구나.' 하는 생각에 젖어들게 되었고 한번 더 남들이 바라보는 나 자신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받아들이는 것이 맞다는 것을 깨우치게 되었다. 남들의 시선을 의식해서 무난한 안경테로 바꾸려고 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인식하고 말았으니까. 서울에 돌아와 안경점에 가지 않고 기존의 안경을 그대로 쓰기로 결정했다. 살짝 튀긴 하지만 이게 나와 어울리는 안경이야. 그리고 이 안경을 쓴 내 모습을 열심히 사랑해 줘야지.


사랑은 구체적인 말을 통해 실현되고
작은 행위를 통해 비로소 실체를 드러낸다.

나를 사랑한다는 건, 원치 않은 내 모습에서
내가 바라는 나, 내가 되고 싶은 나로 이끌어가는 게 아닐까요?

<아름다움 수집일기> 중
이전 08화 안정형인 줄 알았는데 회피형이었을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