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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소한 Jun 09. 2024

가족들에게 소외감을 고백하다

고백은 관계회복의 신호탄이 된다

우울감에 한참 빠져있을 때 접하게 된 유튜브 채널이 있다. 자신의 우울감을 고백하고, 그 일상을 담담하게 풀어낸 브이로그 채널이었다. 나이대얼추 또래인 것 같은데 가족과 떨어져 독립한 지 꽤 오래되어 보였고, 연락을 하지 않은 채 살아가는 느낌도 받았다. 가족과 떨어져 지내야 할 사연 하나쯤 어느 가족이나 있기 마련이기에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했고, 나는 나름 화목한 가정에서 지내왔는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와 별하기는 했으나 성장과정에서 가족 간에 크게 다투거나 한 적은 없었으니 이 정도면 무난한 것 아닐까 싶었다. 그렇지만 올해 초부터 진지한 자아성찰을 시작하고 정리하면서 내 가치관의 최우선순위에 가족이 있다는 것을 다시금 자각하게 되었으며, 오히려 서로에게 관심이 없었기에 감정적으로 부딪히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친오빠와 나의 이야기를 해보겠다. 몇 살 차이 나지 않는 남매가 으레 그렇듯 우리는 '어색한 사이'다. 톡을 하며 이모지를 휘황찬란하게 사용하기 좋아하는 나지만 무미건조한 ㅇㅇ, ㅇㅋ와 같은 자음 위주로 대화를 하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 오빠 되시겠다. 오빠가 또래들에 비해 빠르게 가정을 꾸리면서 성인이 된 후 같은 집에서 지낸 시간도 상대적으로 짧다는 건 핑계일까. 오랜만에 만나면 무슨 화두를 꺼내야 할지 잘 모르는, 충분한 대화를 통해 서로를 알아가는 절차가 패스된 사람.


하지만 오빠가 군대 간 뒤 집으로 짐이 돌아왔을 때, 이른 결혼을 하며 본가를 떠났을 때 잠시나마 생전 처음으로 느꼈던 묘한 감정이 우리가 남매라는 것을 인증하는 듯했다. 고백하자면 나와 달리 심각하거나 예민하지 않고 무던하면서도 열심히 살아가는 오빠의 성향을 남몰래 부러워하기도 했었다.


하루는 가족 단체 채팅방에서 내가 툭 던진 말에 오빠가 기분이 상했던 날이 있었다. 나의 의도는 전혀 그렇지 않았지만, 오빠는 내가 자신을 나무라는 발언을 했다고 오해한 상황이었다. 의도가 어쨌건 받아들이는 사람 입장에서 기분이 나빴으니 빨리 오해를 풀고 싶어 퇴근 후 전화를 걸었다. 당연히도 싱겁게 마무리될 줄 알았던 우리의 대화는 어쩌다 보니 감정적으로 치닫기 시작했고, 전화를 끊기 전 마지막 나의 말은 '난 어려서부터 엄마랑 오빠한테 고민 털어놓은 뒤 한 번도 위안된 적 없었다'였다. '나는 나를 응원해 주는 사람한테만 내 고민 얘기하고 싶다'라는 발언은 덤. 오빠는 꽤나 충격을 받았는지 잠시 동안 말이 없었고 그 순간 나는 울고 있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오빠와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요즘 개인적으로 힘든 상황이라서 감정적으로 얘기한 점은 미안하다고 사과했고, 오빠는 나중에 새언니랑 같이 술 한잔 하면서 얘기하자고 했다. 나의 폭탄발언에 가까운 고백으로 인해 우리는 서로 간에 대화가 필요함을 30년 만에 깨닫게 되었다. 아직 그 술자리는 마련되지 않아서, 나의 발언에 대해 어디서부터 설명을 시작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다.


생각해 보면 엄마나 오빠에게 내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놨던 적이 거의 없었다. 내가 얘기를 한들 현실을 살아내기 급급한 내 가족들이 이야기를 잘 들어줄까 싶어 미리 예단했었다. 부담 주지 않으려고, 나보다 더 팍팍한 삶을 살고 있으니까, 상대적으로 내 고민이 너무 가볍게 느껴질까 봐 내 마음이 소리치고 있는 말들을 전하지 못하다 역효과만 난 셈이다.



다음 타자는 엄마다. 20대에는 나와 가장 반대인 인간상이 바로 엄마라고 생각하며 지냈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인 파스타를 엄마는 느끼하다며 잘 먹지 않았고, 엄마의 취향인 파랗고 알록달록한 플라워패턴의 그릇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심지어 설거지할 때도 무거움), 엄마의 기분전환을 위해 주말에 어디 다녀올까? 제안하면 집에서 쉬고 싶다는 핑계로 거절되기 일쑤였고, 식사 후 바로 소파에 드러눕거나 가스밸브 잠그는 것을 매번 잊는 엄마의 습관 역시 나는 매일 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반대로 엄마는 쌓여있는 머리카락 제때 치우라거나 내가 집안일에서 무언가 놓쳤을 때 이때다 싶은 잔소리를 했다) 서로를 이해하고 수용하려는 태도가 1도 없었던, 생각해 보면 아주 고구마처럼 답답한 시절이었다.


엄마 친구분을 만나서 상담까지 해도 풀리지 않고 대치되던 입장 차이는 내가 30대에 접어든 동시에 엄마가 환갑이 되면서부터 서서히 좁혀지기 시작했다. 내가 엄마보다 잘 알면서도 잘하는 영역이 생겼고, 이제는 경제적으로도 엄마의 활동 일부를 서포트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 것도 한몫했다. 내가 30이 되어서인지, 엄마가 60이 되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엄마가 지금까지 30년 가까이 나를 뒷바라지해 준 만큼 지금부터는 내가 할 차례라는 생각이 마음 한편에 크게 자리 잡았다. 그제야 엄마 친구분이 해주신 이야기가 비로소 납득되었다. 아무래도 세대가 다르니 서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뉘앙스의 말을.


엄마의 인생은
500~600 페이지 분량의
두꺼운 책과 같아서
한 번에 읽을 수는 없단다.



곧잘 엄마와의 진지한 대화를 시작하게 된 딸은 어린 시절의 스스로에 대한 이야기를 엄마에게 전한 적이 있었다. '나 학생 때는 엄마가 매번 더 좋은 성적을 받아오라는 그 말을 무의식적으로 따르면서 조금씩 완벽주의 성향을 가진 애가 된 것 같아. 물론 엄마의 말이 절대적인 영향은 아닐 수 있겠지만 어느 정도 영향이 있다고 느껴져. 그렇다고 엄마를 원망한다는 건 아니야.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었으니까 힘들지 않았을까?'


엄마의 2-30대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날도 있었다. 엄마 역시 부모와 충분한 애착관계를 형성하지 못했고, 결혼한 후에도 경제적인 불안과 함께 심리적으로 우울감을 느꼈다고. '나의 엄마'라는 페르소나를 제외한 한 명의 개인으로서 들었던 엄마 이야기는 마음이 아팠다. 앞으로는 내가 더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는 마음과 함께, 그렇게 나와 다르다고 생각했던 엄마의 모습에서 나를 봤던 날이었다. 약지 못하면서 순진하고, 가끔은 우울감도 느끼는 여린 존재였다는 것을.




어느 정도 자아가 형성되기 시작하는 나이를 시작으로 하면 엄마와 오빠, 내가 한 집에서 같이 살았던 시간은 대략 15년이다. 우리 집은 어릴 적부터 그렇게 살가운 분위기가 아니었기에 서로를 생각하고 대화를 통해 상대방에 대해 알아갈 수 있는 시간이 적었다. 그저 서로의 건강과 안녕을 가족의 달 5월과 생일 때만 비로소 상기시키며 굳이 말로 하기에는 낯부끄러운 마음을 전달해 왔을 뿐. 내가 진지한 자아성찰을 시작하며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의 작은 갈등 속에서 느꼈던 교훈은, 아무리 가깝다고 하더라도 말하지 않으면 누구도 내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 가족에게는 서로를 이해하는 시간이 아직 더 많이 필요하다.


토끼 같은 자식들을 둔 오빠는 어엿한 한 집의 가장이 되었고, 머지않아 나도 언젠가는 나만의 가족을 꾸리게 될 테니 무뚝뚝했던 우리 세 가족의 세계는 조금 더 확장되어 갈 것이다. 올해가 가기 전에는 꼭 오빠와의 술 한잔 타임을 가져야지. 내가 지금까지 느껴왔던 가족에 대한 복잡한 감정들을 조금 부끄럽지만 용기 내서 하나씩 꺼내놓을 것이다. 오빠와 엄마가 나를 생각하는 마음이 꼭 내 크기와 똑같지는 않더라도, 내가 먼저 나의 마음을 내보이고 어린 시절에는 충족되지 않았던 여린 마음들을 어루만지면서 더 단단하게 뭉치는 가족이 되고 싶다. 내 가치관의 Top3는 아마 변하지 않을 거니까. 나의 가장 소중한 가족을 위해서, 내밀한 이야기를 시작해 볼 시점이다!


어린 시절 온 가족이 함께 갔던 서울대공원을 다시 가봐도 좋겠다.


*다음주에 연재 회고글로 만나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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