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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남 Jan 29. 2022

24. 그리운 사람을 그리는 시

회인시懷人詩_ 박제가와 나빙

옛사람들은 회인시懷人詩를 많이 지었다. 회懷 자는 ‘품다’나 ‘위로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다. 회인시는 동시대를 살던 학자와 문인, 예술가 가운데서 존경하고 좋아하는 사람을 골라서 그 사람의 인생을 노래하거나 자신과 얽힌 일화나 우정을 소개한다. 초정 박제가는 회인시만 100수가 넘게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시 속에 인물들의 특징과 깊은 내면을 간결하면서도 정확하게 포착해서 묘사하고 있다.

문득 현대의 연작 장시長詩 고은의 《만인보》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총 30권으로 이루어진《만인보》에는 5,600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모두 실제 인물, 역사와 시대 속에서 만난 역사적 인물, 불교적 체험 속에서 만난 초월적 인물들이다. 시인 자신은 ‘이 세상에 와서 알게 된 사람들에 대한 노래의 집결’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하니《만인보》를 현대인이 쓴 대표적 회인시라고 할 수 있겠다.

《무예도보통지》를 쓴 무인 백동수는 박제가와 절친이었다. 그는 무예가 출중했지만 서출이라 아무 벼슬도 못 하고 곤궁하게 지내다 강원도 인제 땅으로 낙향하게 되었다. 백동수가 매사냥을 하러 서울 가까이 지평현까지 왔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혹시 자신을 찾아오지 않을까 했다며 박제가가 쓴 시가 있다.   

   

시절이 태평하여 농사나 즐기는 장사는/ 식솔을 이끌고 기린협 골짝으로 떠났네/ 내린 눈이 녹지 않은 지난 겨울 언젠가/ 매를 끌고 동쪽 고을 지평현을 지났다는데     


한편 박제가는 1778년 첫 방문 이후 네 번의 연행을 통해 당대 일급 학자들과 사귀었다. 서로의 인품과 지식의 깊이를 알아본 그들은 밀도 높은 우정과 지식을 나눴다. 그 중에서도 화가 나빙과 박제가의 사귐은 특별했다. 박제가는 40세, 나빙은 56세로 나이 차이도 많이 나고 국적도 달랐지만 세상의 새로운 소식에 민감했고 변화하는 현실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공통점이 있었다.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친해졌고 헤어지는 아픔은 더욱 컸다.

나빙은 박제가에게 초상화와 매화 그림을 선물했다. 군관 복장의 박제가 초상화 옆면에 나빙은 “이제부턴 멋진 선비 보더라도 냉담하리. 이별의 아픈 마음 너무도 많이 다치나니.(從今冷淡看佳士, 唯有離情最愴神.)”라고 썼다. 작별의 슬픔이 너무 크니 앞으로는 절대로 정을 주지 않겠다고 한 것이다.      


겨우 두 번 그대와 만났었는데/ 생각하매 그대는 떠나고 없네

우리 사이 길 멀다고 한탄하지 않고/ 그대 홀연 떠나감을 한탄한다오

풋 잠결에 그대를 만났었는데/ 서두르며 몇 마디 이야기했소

모르겠네 그대도 꿈을 꾸면서/ 혹시 나를 만나지 않았던가요     


두 번 만난 후 써준 나빙의 시에 박제가는 몇 편의 시를 부쳐 화답한다.     

 

천년의 짧은 이별 술은 갓 깨어나고/ 사해에 벗 논하니 마음 온통 환했다오

내 보물 모두 다 산 것이 아니어니/ 허름한 시낭 화축 가벼이 미소짓네     


가난해서 책이나 서화를 변변하게 살 수 없지만 가방 안에 북경의 문사에게서 받은 시와 나빙이 그려준 그림이 들어 있어서 흡족해하는 박제가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다. 이렇게 두 사람은 인편을 통해 편지와 선물을 주고받으며 우정을 이어 나갔다. 

그러나 1801년, 박제가가 네 번째로 북경을 방문했을 때 나빙은 죽고 없었다. 박제가는 나빙이 살던 곳을 찾아서 위패를 놓고 제사를 지내며 곡을 하였다. 이를 본 사람이 “당신 나라에서도 이렇듯 돈을 쓰며 벗의 제사를 지내줬냐?”고 물었다. 그러자 박제가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을 알아주는 벗이니 돈을 쓰고 안 쓰고는 따질 바가 아니요.” 이렇게 대답했다.

삶에서 마음에 맞는 벗을 만나는 일은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가. 사랑과 우정은 나이와 언어와 시간을 뛰어넘는 것. ‘매화 피는 계절이 찾아오면 멀리 있는 그대를 그리워할 것’이라고 말하는 벗이여!           

   <나빙이 그려준 매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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