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자까야 Apr 30. 2024

예능이 재밌냐

예능 프로그램 안의 연예인들은 재미있는 게임을 하며 항상 웃고 떠든다. 그 세계가 참 좋아 보였다. 나도 동참하고 싶었다. 재미있는 세계를 만드는데 일조하고 싶었다. 재미있는 예능은 만드는 과정도 재밌을 줄 알았다. 그래서 방송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직접 경험한 방송 일은 달랐다재미있는 걸 만드는 과정은 결코 재미있을 수 없다. 웃음을 만들기 위해서는 치밀한 전략과 빈틈없는 준비가 필요하다. 연예인들이 간단한 퀴즈 대결을 한다고 가정해 보자. 너무 쉽거나 지나치게 어려운 문제는 안 되기 때문에, 시청자들도 몰입할 수 있는 적당한 수준의 문제를 선별해야 한다. 정답을 눈치챈 출연자가 부저를 울릴 건지, 깃발을 뽑을 건지 결정하고 그에 맞는 소품을 준비해야 한다. 진 팀에게 주어질 벌칙을 정하고, 벌칙에 맞는 소품을 또 준비해야 한다.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게임 하나를 준비하기 위해서도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어간다. 촬영 준비 중 놓친 소품이 없는지 전전긍긍하고, 협업 중 마음 안 맞는 피디들과 기싸움하고, 생각이 다른 선배들 눈치 보다 보면, 더 이상 나에게 예능은 재미있는 것이 아니다. 예전에 예능을 볼 때, 설레던 감정은 안중에도 없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작가일을 시작하고 몇 년이 흘러 있었다.


전략을 변경했다. 재미보다는 안정감에 초첨을 두어 일을 하기 시작했다. 고정적으로 페이를 주는 정규 프로그램을 찾아다녔다. 추천으로 대부분의 취직이 이루어지는 작가들의 세계에서 '평판'은 중요하다. 내가 원하는 안정적인 프로그램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평판을 잘 관리해야 한다. 그래서 다른 작가들의 맘에 들게 일하고 있는지 끊임없이 점검하고 또 점검했다. 완벽해 보이고 싶었다. 내가 아니라 남들을 위해 일하다가 6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늘 불안했다. 어제 했던 실수로 선배들에게 안 좋은 평가가 씌어지면 어떡하지, 다음 일할 프로그램이 안 구해지지 어떡하지. 갑자기 업무가 내려지지 않을까, 출연자가 투정 부리지 않을까 실시간으로 경계하며 늘 핸드폰을 쳐다보고 있었다. 주말에도 카톡음이 띠링하고 울리면 허겁지겁 핸드폰을 들었다. 비참했다. 재미있게 일하고 싶어서 예능 작가를 한 건데.


모임  일을 시작하면 불안증이 어느 정도 완화될 줄 알았다. 혼자 일을 하다 보면 눈치 볼 사람도 없고, 실시간으로 업무를 지시할 사람도 없을 것 아닌가. 하지만 그 불안은 다른 곳으로 번졌다. 신청자가 없어 모임이 없어지지 않을까, 내 모임을 찜 해둔 사람이 적지 않을까 걱정하며 어김없이 핸드폰을 들었다. 등골이 서늘했다. 결국 또 똑같은 상태로 돌아오는 것 같았다.


처음 기획한 모임은 '내 이야기가 라디오에서'이다. 모임 전 각자의 사연을 텍스트로 받아,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한다. 그리고 모임 날 아날로그 카세트로 재생하는 모임이다. 익명으로 사연을 받아 현장에서 카세트로 재생하면 평소에 하지 못하는 진솔한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아 열심히 준비했다. 하지만 이때 예상치 못한 것들이 많았다. 카세트로 사연을 녹음하려면 꽤 많은 장비가 필요했다. 카세트 덱, AUX선 등 장비를 준비하는 데만 15만 원이 넘게 들었다. 그리고 텍스트로 온 사연을 카세트에 녹음하는 과정이 하루 꼬박 걸렸다. 이게 끝이 아니다. 내 모임 취향과 맞을 것 같을 사람들에게 열심히 초대 메시지로 보내고, 답장이 올지 안 올지 지켜보며 마음 졸였다. 그렇게 모임 하나를 보름 넘게 준비했고 6명이 왔다. 모임이 끝나고 다들 모임이 잘 될 거 같다고, 또 참석하고 싶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성공적이었다


어수룩하게 준비했던 모임에 참가했던 분들. 그분들께 진심으로 고마웠다. 친구가 커피를 사줄 때, 동료가 일을 알려줄 때 고마움과는 또 다른 고마움이다. 굳이 말하자면, 나를 믿고 나의 창작물에 기꺼이 시간과 돈을 투자해 준 것에 대한 고마움. 열심히 만든 콘텐츠에 몰입해 준 것에 대한 고마움. 내 기획 능력을 알아준 것에 대한 고마움. 이때까지 끊임없이 한 방향으로 달려오다 다른 커리어를 도전한 거였기 때문에 걱정이 많았다. 의심하고 또 의심했다. 하지만 참가자들의 칭찬은 마치 6년 동안 방송일에 바쳤던 시간이 헛되지 않았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지금 가는 방향이 틀리지 않았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방송이 아니라도 나는 충분히 빛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적자 20만 원을 안고도 떨리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5개월이 지난 요즘도 모임 참가자들에게 감사한 마음은 식지 않는다. 그동안 20개가 넘는 모임 여러 가지를 진행했다. 같은 모임에 여러 번 방문해 주는 참가자들도 있고, 다른 각각의 모임에 방문해 주는 참가자분들도 있다. 그러고 "이자까야 님 모임이라서" 참석했다고 말씀해 주시고, 진심으로 모임에 몰입해 주신다. 그럴 때면 나는 끊임없이 감사하다 말씀드린다. 모임 후기 글로도 감사한 마음을 표현한다. 다른 모임장들은 센스 있고 부담스럽지 않게 감사한 마음을 후기로 잘 전달하던데 나는 그게 잘 안된다. 무엇이 어떻게 감사한지 열거하다 보면 진지하고 딱딱한 후기 글이 되고 만다. 모임을 준비하는 건 외롭고 불안한 일이다. 하지만 글로 말로 '고맙다', '감사하다' 말하고 나면 다음 모임을 준비할 수 있는 추진력이 된다. 요즘 드는 생각이 있다. '모임'을 운영한다는 것은 결국 '끊임없이 감사해하는 것'이구나.


사실 예능 작가로 일하면서 외로웠던 것 같다. 완벽해야 된다는 중압감 때문에, 동료가 있어도 기대지 못했다. 인정을 받아도, 진심으로 고마워하지 못했다. 혼자 계속해서 아등바등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모임 일을 하며 끊임없이 감사하다 말하다 보면, 혼자 모임을 준비해도 그다지 외롭지 않게 된다. 모임을 만드는 건 혼자 하는 거지만, 결국 모임을 완성시키는 건  참가자들이다. 참 중요한 걸 모르고 살았다. 세상에 혼자 하는 건 하나도 없는데. 방송일을  할 때도 감사하다 표현하며 모두와 함께 일한다는 걸 알았어야 했다. 인정을 받는 건 한순간이지만, 감사하다 말하면 나는 혼자가 아니다. 함께 있다는 사실이 앞으로 나아갈 에너지를 준다. 아마 내가 늘 불안했던 건 고마움을 표현하지 못하고, 혼자 일했기 때문이 아닐까.


재미를 찾아 직업을 선택했지만, 치열하게 살다 보며 내가 생각하던 재미를 잃어버렸다. 앞으로의 내 밥벌이에 더 이상의  재미는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방송 밖을 나오니, 다른 수많은 재미가 있다. 웃고 떠드는 것만이 일하는 데 유일한 재미가 아니다. 타인에게 감사함을 느끼고, 추진력을 얻어 한 발 더 내딛는 것. 그것도 큰 재미가 될 수 있고, 일을 해내는 데 동기부여가 될 수 있다. 여전히 모임을 운영하는 건 한 치 앞을 모를 정도로 불안한 점이 많다. 야심 차게 기획한 모임이 사람이 안 올 수도 있고, 페이도 방송일에 비해 한참을 못 미친다. 하지만 또 모임을 개설하는 내 모습에 가끔씩 놀란다. 돈을 조금 못 벌어도, 매번 위태롭고 불안해도, 결국 감사한 마음이 나를 움직이게 한다. 

이전 01화 이러니 사람들이 티브이를 안 보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