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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자까야 May 07. 2024

예능 아니면 안 돼

내가 일하는 곳이 예능이 아니면 안 될 줄 알았다. 사람들이 티브이를 안 보고, 일자리가 점점 말라갔지만, 주야장천 티브이 예능만 찾았다. OTT 예능도 안 되고, 유튜브도 안 됐다. 티브이 예능만이 내 경력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했다. 그곳만이 내 커리어의 정석이라는 이상한 신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지만 작년에 5개월 동안 기록적인 백수 기간이 길어지면서 이내 불안감에 휩싸였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도태될 것 같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나 자신과 타협하고, 유튜브 예능을 시작했다. 구독자 30만 명 정도의 몰래카메라 주력 채널이었다. 처음엔 썩 내키지 않았다. 감동 몰래카메라로 인기를 얻은 채널이지만, 최근 선정적인 몰래카메라, 자극적인 몰래카메라로 노선을 변경하려 했기 때문이다. 'TV 예능'이라는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나는 1차원적인 콘텐츠를 할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을 시작하고 난 뒤 생각은 달라졌다. 재밌었다. 우선 작가가 나 혼자라는 점이 좋았다. TV 프로그램을 하면 다른 작가님들 눈치 보느라 내 할 말을 다 하지 못했다. 하지만 내가 혼자가 된 이상, 내가 하고 싶은 말, 아이디어를 마음껏 분출할 수 있어 좋았다. 자연스럽게 배운 점도 많았다. 내가 만든 상황이 잘 작동되지 않거나, 재밌게 풀어지지 않았던 경우가 있었는데, 그걸 내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작가 팀으로 일할 땐 선배들의 경력이 안전망으로 작용했지만, 혼자 일할 때는 모든 것이 오로지 나의 책임이었다. 그래서 나는 마음껏 실패했다. 피디들과 회의에서 여러 아이디어를 까이면서, 어떤 게 좋은 아이디어인지, 좋은 아이디어를 어떻게 설득해야 되는지 깨닫고, 영상에 대해 내 개인적인 의견을 거침없이 제시하며 피디들과 커뮤니케이션했다. 채널 담당자는 너무 자극적인 걸 하고 싶지 않다는 의견도 존중해 주었다. 당시 100만 조회수 영상도 달성해 봤다. 티브이 프로그램 시청률 높게 나온 것과는 성취감의 차원이 달랐다.


티브이를 벗어나는 것이 오히려 나의 성장에 도움이 많이 되었다. 그 어느 때보다 많이 보고 경험하고 배웠다. 그리고 유튜브 채널 다음으로 시도해 본 것이 바로 '모임'이다. 사실 예능 밖에서 나는 아무것도 못할 것 같다는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는데, 모임을 하며 그게 아님을 깨달았다. 내 능력이 모임 기획에 굉장히 유용했다.


우선 콘텐츠 기획 능력이 도움이 되었다. 방송에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예능을 만든다.  그중에 한 가지가 '융합'이다. <솔로지옥>과 같은 예능은 '연애'의 요소와 '게임'의 요소를 융합해서 만들어진 예능이고, <미스트롯>은 '트로트'와 '서바이벌'을 융합해서 만들어진 예능이다. 이처럼 친숙한 것 두 개가 결합하면 독창적인 콘텐츠가 탄생한다.


해당 공식을 적용하여 만든 것이 <스페인어 몰라야 올 수 있는 스페인어 모임>이 있다. '스페인어 공부'와 '게임'의 요소를 결합해서 만들었다. 팀을 구성해서 스페인어와 관련된 여러 액티비티를 하는 모임이다. 스페인어도 배울 수도 있고,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는 '소셜링'의 본질에 더욱 적합한 모임이 되었다. 현재 해당 모임은 약 100명가량의 사람이 다녀가고 일주일 전에 정원이 마감될 정도록 인기가 있는 모임이다.


그리고 '기획' 뿐만 아니라, 내가 생각보다 모임을 잘 '운영'한다는 것도 실감했다. 예능 작가의 경험을 활용한 덕분이다. 예능 작가는 수도 없는 인터뷰를 한다. 프로그램마다 차이가 크지만, 출연자를 한 명 확정시키기 위해서 최소 10명 이상의 출연자를 만난다. 출연자 후보들을 직접 만나 이야기해 보며, 해당 사람이 개성이 뭔지, 프로그램에 잘 어울릴 사람일지, 어떤 역할을 해낼 수 있을지, 누구와 붙여야 케미가 살지 곰곰이 탐구한다.


예능 작가로 했던 무수한 인터뷰의 경험을 모임 참가자들에게 쏟았다. 내 모임에 참가해 주는 사람들의 성격이 어떤지, 매력이 어떤지 관찰했다. 근육질 몸에 예술을 좋아하는 참가자가 온 적 있다. 모임에 적응하지 못하고 말을 할 때면 얼굴이 빨개지며 쑥스러워했다. 그때 내가 그분께 '감성 근육맨'이라는 캐릭터를 부여했다. 친근한 캐릭터가 만들어지자 다른 참가자들이 '감성 근육맨'의 이야기를 더 호감을 가져 듣게 되었고, '감성 근육맨'은 모임에 더 잘 융화될 수 있었다. 또한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을 짝 지어 줄 수도 있다. 잘 맞을 것 같은 두 사람을 발견한다면, 일부러 "~ 님의 말에 공감하시나요"라고 리드하여 두 사람의 대화를 이어주며, 유대감을 형성해 낸다.


예능이 아니라 모임에서 내가 유용하게 쓰이는 이유가 한 가지 더 남았다. 모임에 참가해 주는 사람들에게 참가 이유를 물으면 꽤 자주 나오는 답변들이 있다. 예능 작가 만나는 게 신기해서요. 그동안 잊고 살았다. 나는 대한민국에서 유니크한 직업 중 하나에 속했다. 일반인들이 티브이로 잠깐씩 얼굴을 비치는 예능 작가를 실제로 볼 확률을 적다. 6년 동안 예능 작가들과 일해서 몰랐다. 참가자에게 나는 관심을 유발할 수 있는 직종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럴 때면 방송 썰이라던가, 내가 얼마나 빡세게 작가일을 했는지 조금의 과장을 보태서 들려주며 참가자의 기대에 충족할 수 있도록 안간힘을 쓴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방송일에서 잠시 벗어난 상태다. 나는 아무것도 아닐 줄 알았다. 티브이만이 내 세상에 전부일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내가 '예능 작가'라는 사실만으로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들이 있고, 내 쓰임새가 있을 수 있다. 안도했다. 6년 동안 혼신의 힘을 쏟았던 작가 경험이 헛되지 않았다. 나는 티브이 밖에서도 충분히 빛날 수 있다. 내가 다시 티브이로 돌아갈지, 모임을 계속할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분명해진 건 하나 있다. 나는 이전보다 훨씬 더 자유롭다. 티브이가 내 세상의 전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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