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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스턴스 (2024)

아름다움은 등을 찢어...???

by 원일



나는 고어물을 생각보다 잘 본다. 그래서 칸에서 "미친 영화 하나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솔직히 설렜다. 하지만 감독 이름을 듣는 순간, 설렘은 순식간에 불안으로 바뀌었다. 2018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심야에서 봤던 리벤지. 나에겐 그해 워스트로 기억될 만큼 별로였던 작품의 감독 코랄리 파르자. 그런 감독이 다시 돌아왔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경계심이 생겼다.

서브스턴스는 생각보다 복잡한 감정을 끌어냈다.



이야기는 이렇다. 전성기가 한참 지난 헐리우드 여배우 '엘리자베스'. 그녀는 몸도, 얼굴도, 경력도 이제는 '젊음'이 아닌 것들로 채워져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신체 속에서 또 다른 나를 꺼낼 수 있는 신기술 '서브스턴스'를 접하게 된다. 그렇게 그녀의 등을 찢고 나온 또 하나의 자아, ‘수’(마가렛 퀄리). 처음엔 그녀를 대역처럼 쓰다가, 곧 '수'가 자신의 삶과 몸을 잠식해오기 시작한다.

이 영화는 그 자체로 뷰티를 빙자한 바디 호러다. 욕망과 집착, 사회가 여성의 몸에 요구하는 잔혹한 규범들이 한 몸 안에서 벌어지는 싸움처럼 그려진다. 예뻐지기 위해 무엇까지 할 수 있는가. 혹은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어디까지 자기 자신을 분리하고 대체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수도 없이 나열한다.




가장 놀라웠던 건 데미 무어였다. 내 기억 속 데미 무어는 상업성과 스타성이 강한 배우였고, 전신 성형이라는 단어와 연결되는 이미지였다. 그런 그녀가, 이런 육체를 찢고 새로운 자아를 꺼내는 영화에서 이토록 처절하고 생생한 연기를 보여줄 줄은 몰랐다. 말 그대로 몸을 던졌다. 그리고 마가렛 퀄리.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에서도 강렬한 인상이었지만, 이번 영화에서 진짜 괴물처럼 빛난다. 육체와 정신이 뒤섞이는 그 복잡한 감정들을 너무 잘 끌고 갔다.





영화적으로 보면 고어, 바디호러, 페미니즘 비판, 디스토피아적 풍자가 뒤섞인 하이브리드 장르물이다. 뭔가가 무너지거나 일그러지는 장면이 계속 나오는데, 그게 단순히 폭력적이라기보다 위선이 찢어질 때 나오는 통증처럼 느껴진다. 보는 내내 고통스럽고, 때론 역겹고, 동시에 너무 매혹적이었다.



꽤 뻔한 욕망을 다루는 영화인데도, 그것을 바라보는 방식이 무척 낯설고 기이해서 강하게 끌렸다. 영화를 보다 보면 몇몇 장면에서 분명히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 드는데, 그건 감독이 여러 고전 호러나 영화들을 끌어다 쓰되, 그걸 뻔하게 소비하지 않고 꽤 세련되고 폭력적으로 재구성했기 때문인 것 같다.

육체가 뒤틀리고, 타인의 시선에 짓눌리는 이야기는 플라이나 소사이어티가 떠오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를 바라보는 순간들은 현기증이나 멀홀랜드 드라이브 같은 영화들을 닮았다. 특히 마지막 무대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슈트라우스의 음악은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떠올리게도 했고, 외형만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절망을 묘하게 아름답게 뽑아낸다.




감독은 이전작 리벤지에선 피와 복수를 다뤘다면, 이번엔 바디 호러와 자아 붕괴, 그 안에 녹아있는 여성의 욕망과 강박을 좀 더 깊고 유려하게 보여준다. 차용은 분명 많은데도 이상하게도 자가복제 느낌은 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 시절 미친 영화들”의 문법을 가져와 현재로 통째로 옮긴 듯한 기분이랄까.




칸에서 ‘미친 영화’라고 불린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어쩌면 진짜 미친 건 우리가 이 아름다움이라는 감옥 안에서 벌이고 있는 모든 것들일지도 모른다.

여성의 육체와 욕망, 그리고 그 안에 숨어 있는 자아의 분열에 대한 이야기였다. 고어를 좋아하는 나조차도 몇 번은 고개를 돌릴 정도로 노골적이고 강렬했지만, 오히려 그 폭력성 덕분에 진심이 느껴졌달까. 감독은 여전히 불친절하고, 설명은 없고, 직설적이다. 하지만 그런 방식이야말로 이 이야기엔 꼭 필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 영화 너무 지독하게 잔인하고 고어해서 못보신다면 시작하지 않는게 좋다는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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