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남겨진 세상의 키리에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했을 때부터 눈여겨보고 있었지만, 부상 때문에 놓쳤던 키리에의 노래. 결국 개봉 직전 시사회로 처음 보게 됐고, 총 3번, 그중 한 번은 부산 여행 중 디렉터스 컷으로 봤다. 이와이 슌지와 히로세 스즈, 둘 다 좋아하기에 기대치가 높았던 건 사실인데, 실제로는 보는 내내 좀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시사회로 본 120분 인터내셔널 버전은 컷 전환이 너무 엉망진창이고 감정을 따라가기엔 불친절한 편이었다. 처음엔 도대체 뭘 보고 있는 건가 싶었고, 두 번째 보면서야 겨우 구조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에 비해 디렉터스 컷은 확실히 호흡이 길고, 느려서 중간중간 지루하다는 평가도 있었지만, 나는 오히려 훨씬 더 좋았다. 그 안에 들어 있는 여운이나 인물 간의 연결감, 공간의 정서 같은 것들이 살아 있었다. 컷마다 감정이 묻어나고, 서사가 덜컥거리지 않았다.
결국 이 영화는 감정이 파편처럼 흩어지고 노래로 이어진 이야기였다. 이와이 슌지 특유의 공기감, 청춘의 잔상, 그리고 시간이 쌓아 만든 기억의 무늬 같은 것들이 묘하게 오래 남는다. 히로세 스즈는 여전히 믿고 볼 수 있었고, 아이나 디 엔드가 연기한 키리에는 조용하지만 단단하게 스며들었다. 세 번씩이나 이 영화를 다시 본 건, 결국 ‘이해’보단 ‘감정’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 영화는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노래하고 흘러간다. 듣고, 붙잡고, 놓치고, 다시 듣게 된다. 그리고 그게 이와이 슌지가 전하고 싶었던 방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이 영화로 마츠무라 호쿠토와 아이나 디 엔드를 처음 마주했는데, 의외의 발견이었다. 마츠무라는 안정적인 연기를 보여줬고, 순간순간 임시완이 떠오를 정도로 분위기 있는 얼굴이라 꽤 인상 깊었다. 그리고 아이나 디 엔드는 처음엔 허스키한 보컬이 너무 강해서 '어?' 했지만, 이상하게 자꾸 맴도는, 중독성 있는 목소리였다. 키리에로서의 존재감도 독특하게 살아 있었고. 영화 속 OST도 좋았지만, 최근 요네즈 켄시와 함께 작업한 MARGHERITA 역시 그녀의 색깔을 더 또렷하게 느낄 수 있는 곡이라 추천하고 싶다.
영화를 보기 전에 알아야 할 건, 이와이의 컬러인데, "블랙 이와이"와 "화이트 이와이"는 이와이 슌지 감독의 작품 세계를 설명할 때 자주 쓰이는 표현으로, 그의 영화들이 지닌 양면적인 정서와 스타일을 구분 짓기 위한 비유적인 표현이다. 공식적인 용어는 아니지만 이와이 슌지의 팬들이 그의 필모그래피를 나누는 방식 중 하나이기도 하다.
블랙 이와이는 어두운 주제와 정서, 잔혹하거나 고통스러운 서사, 죽음, 고립, 정체성, 상실감 등이 중심인 작품들을 의미하고, 감정이 격렬하고, 무기력한 현실과 심리적 불안, 사회에서 소외된 인물들을 조명하는 경향이 꽤 강하다
예시를 들면 '피크닉', '릴리슈슈',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 '뱀파이어'가 거의 진성 블랙이와이의 대표작이다. '립반윙클의 신부'또한 블랙이와이에 가깝다.
화이트 이와이는 맑고 투명한 정서, 청춘, 첫사랑, 추억, 순수함 등을 담은 영화들이 여기에 속한다. 잔잔한 감동과 여운, 노스탤지어적 무드, 감성을 자극하는 음악을 사용하고
한국인들이 사랑하는 '러브레터', '4월 이야기', '하나와 앨리스', '라스트 레터'가 화이트 이와이를 대표한다.
키리에의 노래는 화이트냐 블랙이냐 따지면, 립반윙클의 신부처럼 블랙과 화이트가 섞여있는데 립반윙클은 블랙의 채도가 더 강하다면, 키리에는 블랙이와이에서, 화이트이와이로 전환되는 포인트가 군데 섞여있어서, 다소 경계선이 모호한 느낌들이 있다.
그래서 아마 호불호 면에서도 더 갈렸던 게 아닐까 싶다.
결국 이 영화는,
러브레터의 이와이를 좋아하는 사람에겐 좀 낯설고,
릴리 슈슈의 이와이를 좋아하는 사람에겐 또 조금 다르게 낯설 수밖에 없는 감성이 있다. 그렇다고 실망만 하기엔 또 아쉬운 구석이 많다. 노래도 좋고 미감도 좋으니까.
디렉터스 컷까지 보고 나니 오히려 좋아졌기에, 기왕 볼 거면 디렉터스컷을 보는 걸 추천드린다.
P.s ) 오프닝에 눈 밭에서 off course의 sayonara를 키리에가 짧게 부르는데, 아이나 버전으로 풀로 듣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