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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이린 Oct 21. 2024

구태여, 그림

연이가 알려준 세상은 각별했다. 어느 곳에서도 경험한 적 없는 것이었다. 수개월에 한 번 봐서인지 매번 커다란 성장을 목격했다. 고개도 못 가누던 갓난아기는 어느새 앉아 있었고, 이내 기어다니더니, 곧 아장아장 걸었다. “이모”라는 말을 엉성하게나마 발음할 즈음에는 누워 있는 내게 다가와 눈을 맞추었는데, 그 순간 새로운 우주에 들어온 것 같았다. 그토록 순수한 존재와 가까이 있어 본 건 처음이었다.


우리 가족에게도 변화가 생겼다. 엄마는 할머니가, 언니는 엄마가, 나는 이모가 되었다. 서로에게서 본 적 없는 모습을 보았다. 할머니로서의 엄마는 손주에게 언제나 등을 내어주었고, 엄마로서의 언니는 작은 아들을 앉혀 놓고 하나부터 열까지 뭐든 친절히 설명했다. 그 장면이 좋았다. 화목하고 따뜻했다. 다만, 아주 가끔은 행복해진 만큼 쓸쓸해지기도 했다. 막 태어나는 세대가 짊어질 부담이 크다는 소식을 접할 때, 직접 목도하는 현실이 부조리할 때 그랬다.


내가 알려줄 수 있는 세상은 대단하지 않았고, 현실을 바꿀 수도 없었다. 그래도 한 가지, 기억할 수는 있다고 생각했다. 한 전시에서 귀여운 아이가 악어 인형을 베고 잠든 그림을 보았을 때 여행에서 연이가 똑같이 자던 모습이 떠올라 웃음이 났다. 조카 사진을 그림과 함께 올려도 될지 여쭈었다가 혹시 개인 의뢰를 받아 작품을 진행하시는지 구태여 질문한 것도 그런 마음이었다. 늘 함께인 코끼리 인형을 남겨주고 싶었다.


언니에게도 물어보았다. 심드렁하면 어쩌나 걱정했던 것과 달리 많이 기뻐했다. ‘나중에 연이가 주식을 사주지 그랬냐고 핀잔주면 어떡하지.’ 장난치며 함께 사진을 골랐다. 완성된 그림을 보고 언니는 정말 예쁘다며, 장가갈 때도 가지고 가게 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엄마는 어느새 프로필 사진을 바꾸었다. 엄마 사진이 아닌 건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오랜만이었다. 이렇게 제작 과정도 설렘으로 가득했던 그림은 얼마 후 액자에 담겨 도착했다. 증명서에는 <코야와 함께>라는 제목이 적혀 있었다.


“가족이랑 친구들을 잃어버리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가 좋아하는 양말, 내가 좋아하는 옷 이런 거는 잃어버리지 않았으면 좋겠어.” 방송프로그램 <유퀴즈>에 출연한 열 살 아이가 ‘시간을 달려 스무 살 자신에게 남기고 싶은 말이 있냐’는 질문을 받고 한 대답이었다. 어쩌면 연이는 잊을지도 모른다. 대전에서 할머니가 있는 부산까지 코야를 데리고 가겠다며 자기 몸보다 큰 인형을 안고 나섰던 것을, 서울로 돌아가는 이모를 배웅하던 창가에서도 코야와 함께였던 것을. 그러면 나는 그림을 보며 말해줄 것이다. 조카가 아꼈던 세상을 세세하고 선명하게 간직하는 건 이모가 할 수 있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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