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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arl K Dec 24. 2021

그들이 사는 세상

너희들의 신세계

학교도서관에서 일하면서 만화를 좋아하는 아이들과 가장 빨리 친해졌었다. 만화책은 도서관을 편하게 느끼게 하고, 애들의 관심과 흥미를 이끌어 내는 아주 좋은 도구였다.

  

한참 아이들과 만화책과 애니메이션 이야기를 떠들다 보면, 애들이 그랬다.

  

  "우와 샘 하고 만화로 대화가 되다니."

  "샘도 본 게 아주 많은 건 아니야."


  "아니에요. 이 정도 아는 샘들 거의 없어요."

  "너도 아키바계(만화로 유명한 아키하바라 서점에 자주 출몰하는 오타쿠들을 지칭하는 단어) 아니냐?"


  "아니 샘은 또 그런 단어를 어찌 아시는 겁니까."

  "나도 아키바계...오타쿠라서?"



   어릴 때 살던 동네에선 만화책을 빌리려면 택시를 타고 읍내에 있는 만화책방까지 나가야 했다.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만화라고 접한 것은 김혜린, 황미나의 작품 정도였다.


   공교롭게도 대학교 1학년 2학기 때 살았던 자취방 바로 옆이 만화대여점이었다. 여름방학 때만 7만 원어치의 만화책을 읽었다. 만화 대여료는 한 권당 100원이었다. 가게 하나를 거의 통째로 다 털었던 셈이다.  


   특이한 선생님이라 생각했는지, 아이들이 생각지도 못한 다양한 분야의 상담을 요청해왔다. 코스프레라는 말을 그때 처음으로 들어보게 되었다. 코스프레란 costume과 play의 합성어로 게임이나 만화 속에 등장하는 캐릭터의 의상부터 헤어스타일, 액세서리, 각종 소품까지 모방하는 일종의 놀이문화다.


   처음엔 살짝 이해도 안 가고 너무 아는 게 없어서, 당시 유명했던 전문 코스어(코스프레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의 인터뷰가 담긴 책을 주문해서 읽어보았다. 코스프레를 하는 이유는 자신이 좋아하는 캐릭터가 되어, 그 캐릭터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껴보고 싶어서란다. 동경하던 대상을 모방하면서 자신감이 생기고,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게 된단다.



   아이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캐릭터를 코스프레하여 매년 3호선 학여울 역에서 열리는 서울 코믹스(이하 서코)에 가서 선보인다. 서코에 가면 멋진 코스어들의 사진도 찍고, 캐릭터 상품들도 사 온다고 했다. 코스프레를 취미로 즐기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고 내게 들려주었다.


   축제 날, 만화부 아이들은 블리치 만화의 사신 캐릭터들을 차례로 코스프레했다. 주말에 짬을 내어 아이들과 함께 서코에 갔다. 코스어와 코스어들을 찍는 전문 사진작가가 가득한 현장을 직접 눈으로 보기도 했다.



   이전엔 전혀 몰랐던, 어쩌면 평생 모르고 지나갔을 수도 있을, 그들이 사는 새로운 세상을 하나 더 알게 되었다. 학교에서 만났던 만화부와 애니메이션부 아이들은 그들만의 신세계를 내 눈앞에 열어 주었다.


   학교도서관에서 구독하던 정기간행물 중에는 학산문화사에서 나오는 만화잡지가 하나 있었다. 매달 부록으로 오는 만화 브로마이드를 걸고, 청소 안내판을 비롯하여 필요한 그림들을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두 번째 학교에서도 만화부와 애니메이션부 아이들과 가장 먼저 친해졌다.


   그중 특별히 친분이 두터웠던 소민이는 새롭게 만들어진 애니메이션 부의 부장이었다. 유희왕 코스프레를 한다며 양쪽 눈 색깔이 다른 오드아이 렌즈(양쪽 눈 색깔이 다른 렌즈)를 구입하기도 했었다. 소민이가 가장 좋아하던 만화는 리뉴얼되어 연재되던 더블오(OO) 건담이었다.


   소민이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좋아하는 만화 이야기 앞에선 한없이 깨 발랄한데, 부모님 이야기를 할 때는 한없이 침울해지기도 했다. 때로 안타깝고 속상할 때도 있었다. 그냥 만화를 좀 많이 좋아하는 것일 뿐인데 이상한 짓을 하는 문제아로 낙인찍혔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소민이가 코스프레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셨다. 하루는 소민이가 울면서 도서관에 왔다. 용돈을 모아 코스프레 의상과 소품을 구입하고, 친구 집으로 택배를 받았다고 했다. 부모님이 안 계실 때 일찍 들어가서 몰래 숨겨놓으려 했단다.


   그날따라 일찍 귀가하신 어머니께 들켜서 어렵게 준비한 의상이 또 죄다 찢어지고 말았다고 했다. 당장 2일 후가 서코인데 이제 의상을 구할 수도 없다며 속상해하는 소민이를 보니 뭐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소민이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다독여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어른들은 왜 그럴까. 우리도 어린 시절에는 무언가 좋아하는 것이 한 가지씩은 다 있었을 텐데. 왜 우리는 어른이 되면서 그 마음들을 다 잊어버리고 묻은 채로 살아가게 될까. 모든 것을 다 허용해 줄 수는 없겠지만, 아이가 정말 바라고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좀 들어주시면 좋을 텐데 하고 생각했다.


   그 후로 소민이는 2년 동안 깨지고 부딪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위해 최선을 다해 싸웠다. 결국 입시를 준비하는 시기에 소민이는 일본에 있는 대학을 가는 것으로 결정했다. 그녀는 JLPT 1급까지 따서 원하던 일본 도쿄에 있는 대학에 멋지게 합격했다.


   졸업식 날에 씩~ 웃으며 "제가 일본 가서 샘 선물도 사다 드릴게요." 하던 소민이의 웃는 얼굴이 가끔 생각난다. 하고 싶어 하던 애니메이션과 코스프레 쪽 일들을 계속하고 있을지도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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