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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arl K Jan 21. 2022

감자도리와 백설이

세 시간 반 출근전쟁

폭설이었다. 전날 퇴근 시간부터 조금씩 부슬부슬 내리던 눈은 밤새 제 덩치를 어마어마하게 부풀려 놓았다.

 

새로운 학교는 낡은 버스를 타고 굽이굽이 좁은 2차선 도로를 40분이 넘게 가야 했다. 처음으로 학교를 찾아가던 날, 피곤함에 살짝 졸다가 깰 때마다 들려오는 버스 정류장의 이름들이 예사롭지 않았다. 마음이 저절로 경건해지는 것 같았다.

 

  "다음 내리실 곳은 용리 공동묘지, 용리 공동묘지입니다. 다음은 용리 제2 공동묘지, 용리 제2 공동묘지입니다. 다음은 제 화장터, 제 화장터입니다. 다음은 청공원, 청공원입니다."

 

   특이하게도 중, 고등학교가 한 교정을 함께 쓰는 형태의 사립 재단이었다. 나는 고등학교 소속으로 일했지만, 중학생까지도 모두 함께 이용하는 도서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서관은 꽤나 아니 심각하게 열악했다. 넓은 독서실 한 편 구석에 자바라*를 치고, 그 좁은 공간 안에 옹기종기 서가와 대출 데스크가 빈틈없이 들어차 있었다.

 

   감자도리와 백설이는 이 학교에서 만난 아이들이다. 감자도리 웹툰의 캐릭터랑 똑같다고, 친구들이 자기를 감자도리라고 부른다고 했던 송아. 피부가 눈처럼 하얘서 백설이라는 별명이 붙었던 예림이. 둘 다 교회에 다닌다는 걸 우연히 알게 돼서, 교회생활 이야기를 하다 보니 더 빨리 가까워졌다. 오래도록 함께 있고 싶었지만 계약기간이 1년도 채 못 되었다. 학교를 떠나야만 하는 시간은 빠르게 찾아왔다.


   계약 종료를 2주 앞둔 2월의 어느 토요일이었다. 전날부터 갑작스럽게 내린 예상치 못한 폭설로 출근길 도로는 완전히 마비되었다. 서둘러 준비하고 평소보다 한 시간은 일찍 출발했지만, 버스는 거북이보다 느리게 기어갔다.


   정작 마의 구간은 따로 있었다. 외곽순환도로와 연결된 삼거리에서 학교 쪽으로 가려면 언덕을 하나 넘어야 했는데, 그 경사가 만만치 않았다. 눈이 쌓인 언덕을 넘어가려던 버스가 엔진이 푸드덕거리는 소리를 몇 번 내더니, 자꾸만 앞으로 나가질 못하고 멈췄다.

 

   게다가 버스 안의 온도는 점점 냉동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장장 1시간 가까이 언덕을 오르기 위해 씨름하던 버스 기사 아저씨는 결국 승객들을 향해 안내 마이크를 드셨다.

 

"저기.. 사람이 많아서 차가 더 안 움직이네요. 내려서 언덕을 걸어서 넘어가고 계시면, 버스가 언덕 위로 올라가는 대로 중간에라도 다시 타세요."

 

   방송을 마치고 내리는 사람들을 향해 아저씨는 일일이 인사를 하셨다.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은 세차게 불어오는 눈보라를 피해 목도리로 얼굴을 칭칭 감고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몇몇 아저씨들은 버스 뒤쪽에서 차를 밀어주었다. 시간이 몇 분이나 지났을까. 또다시 몇 번의 푸드덕거리는 소리 끝에, 부아앙~ 하는 시원한 엔진 소리가 들렸다.

 

   학교에 도착하니 이미 12시였다. 집에서 출발한 시간이 8시 반이었으니 장장 3시간 반이 걸려 겨우 출근한 셈이다. 마음이 급해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뛰어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도서관과 고등학교 건물이 연결된 구름다리에서 두 아이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감자도리와 백설이었다.

 

"쌔앰~~~~ 우리가 샘 기다렸어요."

"추운데 계속 밖에서 기다린 거야? 감기라도 걸리면 어떡해."

 

"이 정도는 괜찮아요. 근데 오늘 휴교래요."

"그럼 집에 가지. 안 추워?"

 

"에이~ 의리가 있죠. 쌤이 오고 계신다 그래서 얼굴 뵙고 갈려고 기다렸어요."

"심심했겠다."

 

"괜찮아요. 눈사람 만들고 놀았어요."

 

  날도 추운데 얼굴을 보고 가겠다고, 무려 3시간 반 동안이나 기다려주었던 거다. 빨개진 얼굴의 두 녀석과 함께 얼른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감자도리와 백설이의 얼어붙은 얼굴이 녹기 시작할 무렵, 금세 퇴근시간이 되었다.

 

"쌤, 이제 집에 가요."

 

"출근한 지 30분 됐는데, 퇴근시간이네."

"오늘 같은 날은 일찍 가야죠."

 

   우리는 사이좋게 어깨동무를 하고 눈 쌓인 교정을 지나 하교했다. 폭설이 오는 날인데도 기다려준 그 마음이 참 고마워서, 너무 예뻐서 감자도리와 백설이에게 '오늘은 샘이 쏜다. 뭐 먹을래?' 했더니 "저는 콜라요. / 저는 우유 마실래요.' 각자 원하는 걸 잘도 골랐다.

 

   아이들이 고른 것 말고도 편의점에 파는 과자까지 맛난 간식을 하나씩 선물했다. 감자도리와 백설이는 버스정류장에 서서 발을 동동거리며 나와 함께 버스를 기다려주었다. 두 녀석은 버스를 타고 가는 내가 안 보일 때까지 손을 흔들며 배웅해 주었다.

 

   눈 오는 출근길, 히터도 꺼진 버스를 타고 오느라 몇 시간이나 온몸이 얼어 있었다. 의리 넘치는 감자도리와 백설이의 따뜻한 마음 덕분에 얼어붙었던 몸이 사르르 녹아버렸다. 집에 돌아가는 길, 구름다리에서 손 흔들던 감자도리와 백설이의 모습이 생각나 입가가 미소로 간질간질해졌다. 많이 지쳤는지 나는 곧, 버스에서 기절하듯 잠들어 버렸다. 아직도 눈 쌓인 교정 한복판에서 소리 지르며 손을 흔들어주던 두 아이의 격한 환영 인사가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있다. 감자도리와 백설이의 으리으리한 의리와 함께 말이다.

 

 

*자바라 : 플라스틱으로 만든 아코디언형 칸막이로 천정에 레일로 고정하여 여닫을 수 있는 형태의 칸막이를 말한다. 문 손잡이에 해당하는 위치에는 각각 N극과 S극의 자석을 달아 두 개의 자바라를 연결하여 공간을 구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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