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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단걸 Sep 19. 2020

호기심이 많은 건 좋은 거겠죠?

방심하지 마세요. 호기심 많은 강아지가 있다면.




꽃님이는 스패니얼 종이다. 이름도 어려운 카발리어 킹 찰스 스패니얼이다. 스패니얼종은 조렵견으로 많이 쓰였다고 했는데 그 때문인지 꽃님이는 호기심이 많다. 집안에 벌레가 들어오면 내가 잡을 때까지 벌레를 쫓아다닌다. 산책하다 새를 보면 무작정 뛰어간다. 그러면 덩달아 나와 봄이도 함께 뛰게 된다. 호기심이 별로 없던 복길이와 봄이만 보다가 모든 일에 호기심이 많은 꽃님이를 만나니 무척 신기했다. 물론 나도 17년째 강아지를 키우는 사람이 아닌가. 호기심 많은 꽃님이에게 대적할 만큼 노하우를 쌓아온 내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뛰는 나 위에 꽃님이는 날고 있었다.


둘째 동생과 함께 복길이를 입양했을 때, 고백하자면 집 안에서 강아지를 키워본 것은 처음이었기에 모든 것에 서툴렀었다. 강아지를 좋아하는 할아버지 덕분에 태어날 때부터 우리 집은 강아지를 키워왔더랬다. 우리 집 믹스견들은 방울이었거나, 방울이거나, 방울이가 될 아이들이었다. 그 아이들은 모두 마당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놀았었다. 어쨌든 우리는 강아지와의 동거에 무지했다. 이를테면 강아지가 사람이 먹는 음식을 좋아하는 것을 몰랐다. 한 번은 동생이랑 함께 고구마를 삶아 먹고 남은 고구마를 밥상 위에 올려두고 자고 일어났더니 고구마는 껍질만 남은 채 사라져 있었다. 나는 동생이 자다가 배고파서 고구마를 먹었다고 생각했고, 동생은 내가 먹었다고 생각했더랬다. 그리고 얼마 후, 동생이랑 떡볶이를 먹고 남은 다섯 개의 떡볶이를 밥상 위에 올려두고 잠들고 일어났더니 떡볶이는 사라졌고, 희한하게도 떡볶이를 담았던 그릇은 설거지를 갓 마친 것처럼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다. 나는 또 동생이 배고파서 남은 떡볶이를 먹고, 양념마저도 함께 싹싹 비워냈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번에도 동생은 내가 먹었으리라 생각했다. 학교를 가려고 준비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복길이가 꾸룩 꾸룩 하더니 떡을 하나씩 토해내기 시작했다. 딱 우리가 남긴 다섯 개의 떡볶이가 이빨 자국 하나도 없이 복길이 앞에 놓였다. 그때 알았다. 사람이 좋아하는 음식은 강아지도 좋아한다는 것을.


나는 과자를 먹다가 잠깐 자리를 비울 때 강아지 키가 닿지 않을 곳에 올려둔다. 절대 강아지들 키가 닿는 곳에 음식을 두지 않는다. 아주 잠깐 자리를 비울지라도 말이다. 복길이와 봄이처럼 호시탐탐 내가 먹는 음식을 노리는 애들만 보다 보니 특히나 음식을 조심했다. 그러나 꽃님이는 달랐다. 그녀는 내가 먹는 음식에 관심이 없다. 시골집에서 가족들이 밥을 먹을 때면 꽃님이는 자기 자리로 가서 코를 골며 잔다. 봄이는 부지런히 밥상 밑을 돌아다니며 누가 흘리는 밥알이 없나 찾는데 말이다. 대신 꽃님이는 물건에 관심이 많은 편이다. 파양 당한 경험이 있는 강아지는 그렇지 않아 보여도 상처를 받아 주눅이 들 수밖에 없는데 꽃님이도 그랬다. 심장병이 있다는 이유로 파양을 경험했기 때문인지 처음 우리집에 왔을때 그녀는 얌전히 앉아있기만 했더랬다. 호기심 많은 강아지가 그랬다는 것은 상처를 크게 받았다는 뜻이었다. 시간이 좀 흐르자 꽃님이는 내가 가진 물건들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화장실에 잠깐 갔다가 나오면 슬리퍼 한 짝이 사라져 있었다. 사라진 슬리퍼 한 짝은 꽃님이의 아지트에 있기 마련이다. 방문 스탑퍼도 꽃님이의 방석에서 발견되고, 내 가방에 있던 서류들도 한쪽이 씹힌 채 발견되었다. 그래서 우리 집에 있는 슬리퍼 밑창은 꽃님이의 수많은 이빨 자국이 남겨졌고 뜯겼다. 스탑퍼도 끝부분이 너덜 해졌고, 아이들 텐트에 있는 고정용 나무 조각은 흔적만 남긴 채 사라졌다. 꽃님이가 이것저것 물어뜯고 저지레를 하기 시작하자 나는 무척 기뻤는데 이 모든 행동들이 나를 믿기 때문일 거라 생각했다. 또다시 버려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본인의 호기심을 이렇게 나타내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나는 꽃님이를 안고 춤을 추었다. 영문도 모른 채 나에게 안겨 함께 춤을 추었기 때문일까. 꽃님이는 본격적으로 뭐든 물어뜯었다.


전동 칫솔을 충전하기 위에 바닥에 내려두었는데 반쯤 씹힌 채로 발견되었을 때 나는 혼내기보단 전동 칫솔을 다시 주문했고, 슬리퍼 밑창이 너덜 해져서 슬리퍼로써의 기능을 못하자 나는 새 슬리퍼를 샀다. 할부도 끝나지 않은, 침실에서 충전 중이던 애플 워치가 거실에 있는 꽃님이 발치에서 발견되었을 때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충전기 위치를 꽃님이 키가 닿지 않는 곳으로 바꾸었고, 1년 만에 새로 산 구두를 잠깐 신어보고 옷을 갈아입고 나와서 마주한, 꽃님이의 방석에서 씹힌 채로 발견된 새 구두는 그나마 끈이 끊어지지 않은 것에 감사했다. 뜯은 흔적은 있지만 끊어지지 않았기에 올여름은 신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꽃님이는 아침밥을 먹고 나서 소파에 올라가 자리를 잡고 자다가도 내가 출근하려고 슬리퍼를 벗고 현관에서 구두를 신고 있으면 호다다닥 달려와서 슬리퍼를 물고 사라진다. 중문 너머로 슬리퍼를 물고 뒤돌아서 사라지는 꽃님이의 신난 엉덩이를 볼 때마다 피곤한 출근길이 조금은 경쾌해진다.


애초에 우리 집에 비싼 물건은 없지만 내가 가진 것들 중에 그나마 값이 나가는 것들에 꽃님이가 호기심을 보이는 것을 보며, 나와 같은 취향이라 우리가 잘 맞는다고 꽃님이에게 “이 가시내, 보는 눈은 있구나”하며 저지레를 하고 괜히 내 눈치를 보는 꽃님이를 달래준다. 그래, 이런 저지레는 언제든 환영이다. 네가 어떤 저지레를 하더라도 나는 너를 버리지 않으니, 안심하고 너의 호기심을 언제든 보여주렴. 그렇지만 10만 원 넘는 물건들은 좀 봐가면서 뜯어주렴.




1년만에 산 나의 새구두. 그래도 신을 수 있도록 끈을 끊지 않아서 참 고마웠던 날.


잡았다 요놈. 당당한 슬리퍼 도둑.


할부도 끝나지 않은 애플 워치를 뜯뜯한 날. 휴우. 놀란 나완 달리 태연하게 잠을 청하는 꽃님이.


쓰지도 않은 연필은 이렇게 길이가 줄어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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