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와 방향
흔히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 더 중요하다고 한다. 지금껏 살아온 경험을 바탕으로 본 결과 둘 다 중요하다. 어느 하나가 더 중요하다고 하기는 힘들다.
나는 빠른 년생이다. 또래 친구들보다 학교를 1년 일찍 들어갔고 내 친구들은 엄밀히 말하면
나보다 선배들인 셈이다.
어찌 보면 1년을 이득본거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또래에 비해 도전할 기회나 앞서 나갈 기회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앞서가기는커녕, A->B로 갈 수 있는 길도 A->C->D->F->B로 돌아 돌아 도착하는 소위 '삽질'을 정말 많이 경험했다.
돌이켜보면 학습을 이해하는 것도 어려웠고, 성격도 또래에 비해 미성숙했던 면이 많았던 것 같다.
1년의 차이가 새삼 크게 느껴졌다고 해야 할까.
오히려 어릴 때는 이런 상황에 대해 절망한다거나 자존감이 떨어지지 않았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괜한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나이가 들면 어찌어찌 잘 살아가는 어른이 될 줄 알았다.
인생의 목표, 즉 꿈이라는 게 한국에서는 보통 직업으로 통용된다.
장래희망도 나중에 커서 무엇이 되고 싶은지 '직업'을 작성했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에 대한 내용은 없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나는 '교사'가 되고 싶었다.
저조한 학업성적에도 선생님이란 직업이 멋있고 좋아 보였는지 꿈은 교사가 되고 싶다고 적었다.
딱히 사명감이나 뚜렷한 목표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중학교-고등학교로 진학할수록, 나의 성적으로 교사가 된다는 게 현실적으로 쉽지 않구나를 깨달았지만, 교사가 왜 하고 싶은지에 대한 목표가 뚜렷하지 않다 보니 노력도 간절함도 강하지 않았다.
'되면 좋고, 아니면 말지 뭐!'
이런 안일한 태도로 응시한 수능에서 좋은 점수가 나올 리가 없었고, 재수를 할 생각조차 없었던 나는
결국 수능점수에 맞춰서 교육과 관련된 과를 겨우 진학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내 인생은 방향을 잃어버린 나침반처럼 헛돌기 시작했던 것 같다.
대학에서는 나름 흥미 있고 관심 있던 교육에 관한 내용을 학습하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도 뭔 자신감인지 졸업하고 취업하면 내가 생각하는 대로 살아가지지 않을까 싶었다.
이런 나의 헛된 예상이 무너지기 시작한 건 학교에서 실습을 나가고부터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20대 초반이 누군가에게 학습을 알려주고, 인도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설펐을까 싶다.
학교의 테두리 안에서 교수님과 동기들 속에만 온실처럼 있다가 사회에 나가서 경험한 실습에서 강력한
펀치 한 방을 맞은 것이다.
첫 시연에서 나름 열심히 계획서와 프로그램을 짜서 진행했지만 떨리는 목소리와 예상되지 않는 반응들에 대처하지 못해서 멍하니 서있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나마도 학생신분으로 실습을 하는 과정이라 실수가 이해되었지만, 내게 첫 실습 시연은 공포의 기억으로 남게 되었다.
그 후로 교육분야에 대한 진로에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다음 목표를 설정하지 못한 채 그저 회피성으로 다른 일을 찾기 시작했다.
행정인턴이나 단기 사무직 등 처음에는 그나마도 교육과 관련된 직무를 담당하는 일을 시작했다.
계약직이다 보니 2-3년 주기로 계약이 만료되어 다른 회사를 찾아야 했다.
교육분야 사무직에서 그냥 사무직으로 업종에 제한을 두지 않고, 그때그때 일 할 수 있는 곳이면
취업을 하게 되었고 그렇게 시간은 하염없이 지났다.
도중에 건강이슈로 쉬었다가 다시 일을 시작하고 이런 패턴들이 젊을 때는 위기감이나 좌절이 크게 와닿지 않았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취업시장은 점점 좁아지고 무엇보다 아직도 뚜렷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결정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실망감이 컸다.
일관된 경력이 아니라 그저 '사무직'이라는 직무에만 맞춰 경력이 쌓이다 보니 이직을 하는 것에도 방향설정이 더더욱 어려워졌다.
3년 전쯤부터 나의 이러한 상황에 대해 진지하게 심각하게 고심하게 되었다.
내가 얼마나 인생을 목적 없이 살았는지 피부로 와닿았다.
꼭 대단한 직업을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정말 내가 뭘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게 제일 큰 문제이고, 위기였다.
위기감을 느끼고부터 마음의 심란함은 불안함으로 이어졌고, 불안함은 우울함을 동반해서 찾아왔다.
그때 우연히 국가에서 지원하는 상담프로그램을 발견하고 지원해서 8회기 동안 상담을 받을 수 있었다.
상담을 받고 나서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 나라는 사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첫 시도를 했던 것 같다.
나는 생각보다 사람에 대해 관심이 있었고, 사람들이 잘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컸다.
이런 성향들이 있기에 명확히 이유를 몰랐지만 늘 '교사'라는 꿈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심리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도움이 되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건 단순히 상담선생님이 멋있고 있어 보여 서가 아니라 정말 마음속에서 내가 하고 싶은
명확한 이유를 찾은 것이다.
나는 뒤늦게라도 하고 싶은 방향을 찾아 심리 대학원에 진학했고 졸업했다.
학생 때부터 심리학을 배우고 경험을 쌓은 사람들에 비하면, 나는 이제 막 속도 내어 가보지 않은 새로운 길을 천천히 가고 있는 것이다.
직업은 무엇을 가져야 할지는 아직 모르겠다.
박사과정에 진학해서 심리학자가 될 수도, 상담자가 될 수도, 임상심리사가 될 수도 있겠지.
어떤 직업을 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사람의 심리적인 문제를 어루만지고, 공감하며 도움이 될 수 있는 역할을 하겠다는 방향은 설정되어 있으니 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만 남았다.
물론 이것 또한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다른 현실의 벽에 막힐 수도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새로운 길로 나아가는 것은 쉽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또 다른 깨달음과 배움으로 어떠한 방향설정을 다시 해야 한다. 포기하지만 않으면 어떻게든 방향을 설정해서 나아가게 될 것이다.
'인생이 이렇더라'라고 말하기엔 섣부를 수도 있지만 그동안 나의 경험으로 미뤄볼 때,
기왕이면 인생의 속도는 적어도 남들과 비슷하거나 빠르면 좋고, 방향 또한 잘 설정해서 이 두 가지가 함께 짝을 이루고 전진하는 것이 좋다.
최대한 시행착오를 줄이고 좀 더 수월하게 목표를 향해 갈 수 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살아오지 못했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는 없다. 인생 실패한 것도 아니다.
방향설정을 잘하면 가속도가 붙어서 언젠가 목표지점에 도달하게 될 테니까.
이건 첫 번째 레슨,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에 대해 생각해 보기
(단순히 직업이 아니라,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에 초점을 두기)
이건 두 번째 레슨,
목표를 설정할 때 이유가 명확한지 생각해 보기
이건 세 번째 레슨,
방향설정이 잘못되었어도 재설정할 수 있는 용기를 내기
이건 마지막 레슨,
인생에 정해진 답은 없으니 실패했다고 생각하지 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