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쾌한 아침. 기분 좋게 일찍 출근했다. 9시부터 걸려오는 전화. 모르는 휴대폰 번호지만 책상에 앉기 전 전화부터 반갑게 받았다.
“지금 금융권에서는 정책자금으로 사업자 대출을 지원하고 있는데 상담 받아보시겠습니까?”
‘오! 나라님께서 돈을 푸신다는 데 얼른 챙겨야지.’ 하는 마음에 의심 없이 통화를 이어갔다. 그렇게 시작된 대
화. 전화기 너머에서 말하는 대로 휴대폰 링크를 클릭, 클릭하다 보니 어느새 귀는 전화에, 눈은 화면에 온전히 몰입해 들어갔다. 뭐에라도 홀린 사람처럼. 코로라19 정책자금에 어마어마한 신청자가 몰리고 있다는 얘길 들었는데 아침부터 대출을 도와주겠다고 전화가 오니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의심 없이 요청한 서류들을 보내고 신분증까지 문자로 전송했다. 코로나로 혼란한 이 시기에 ‘정책자금’이라는 한마디에 넘어가 예상치 못한 하
루를 보내고 만 것이다.
살면서 ‘대환’이라는 단어를 쓸 일도 들을 일도 없는데 1332 네 자리가 찍힌 전화를 받아보니 금감원이라고 했다. 혹시나 해서 휴대폰을 귀에 댄 채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금융감독원 번호가 1332 맞다. 단순하게도 그 순간 의심은 신뢰로 바뀌었다. 이때부터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지시에 따라 대출 절차를 밟으며 오전을 보냈다. 그런데 다른 쪽에 대출이 있으면 일부를 상환하라는 전화가 다시 왔다. 그러면 금리가 낮아진다고 했다. 나는 이자를 좀 더 낮춰보려고 그들이 말해준 계좌로 송금을 하고야 말았다.
혹시나 해서 카드사 대표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통화음이 울리면서 휴대폰 화면이 위아래로 나뉘었다. 이후 ARS 안내가 들리는데 귀에 거슬리는 잡음이 섞여 있었다. 이상하다는 생각을 잠시 했지만 멀쩡한 휴대폰 전원만 몇 번 껐다 켰을 뿐이다. 사실은 그때 의심을 했어야 했다. 그들은 다시 대출을 빠르고 안전하게 진행하기 위해서는 고객이 보증보험도 들어야 한다며 2차입금을 요구했다. 그럼 더 이상 진행하지 않겠다고 화를 내면서 전화를 끊었다. 그랬다가 만약 오늘 안에 대출이 정상적으로 진행된다면 은행이나 기관 방문 같은 부가적인 절차 없이 끝나는 것이니 조금만 더 참자는 생각에 2차 송금까지 완료했다. 그렇게 대출이 완료되기만 기다리는데 퇴근시간이 다 되어간다.
“오늘 중에 대출이 처리되는 게 확실하죠?”
“네. 은행 마감은 4시지만 저희는 6시 반까지 업무를 하니까 오늘 중에 꼭 대출이 완료됩니다.”
그래도 내심 불안한 느낌이 들었지만 전화 걸면 꼬박꼬박 받고 문자에도 바로바로 대답하는 성실함에 참았다. 오후 6시 25분이 되자 담당자가 오늘은 아무래도 대출 진행이 힘들겠다며 내일아침에 출근해서 몇 가지 더 확인한 후 바로 처리하겠다고 말한다. 신뢰감 있는 목소리로 점잖게 고객에게 양해를 구하는 모습에 따지지도 못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래, 난 하라는 대로 다 했으니까 내일까지만 기다리자.
조금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저녁을 먹으러 단골 분식 집에 갔다. 주인이 잠시 외출했는지 휴대폰도 테이블에 두
고 가게는 비어 있다. 기다리면서 뭘 먹을까 생각하다보니 ‘아니 왜 오늘까지 확실히 처리한다고 해놓고 내일로 미루지?’ 하는 의심쩍은 마음이 들어 퇴근한 시간인 줄 알면서 담당자 휴대폰으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제가 불안해서 그러는데요, 혹시 오늘 송금한 게 문제 있는 건 아니죠? 아무래도 불안한데 내일 확실히 처리되는 게 맞나요?” 이미 나는 그물에 걸린 고기였다. 그들은 수화기 너머에서 배를 잡고 웃었을 것이다. “고객님 전혀 문제없고요, 내일아침에 연락드리고 잘 마무리하겠습니다.”
왠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주인 언니가 돌아오기도 전에 식당을 뛰쳐나가 길 건너 지구대로 갔다. “제가 아무래
도 오늘 보이스피싱을 당한 것 같은데 여기서 도움 받을 수 있나요?” “아뇨, 그런 사건은 가까운 경찰서로 가셔야 합니다.” 10여 분 거리에 있는 경찰서 가는 길이 천릿길 같았다. 가슴이 마구 벌렁거린다. 이럴 수가! 정신 차리고 생각해보니 대한민국 나랏돈을 빌려 쓰는 게 이렇게 전화 한 통화로 진행될 일이었나. 아니, 시간상으로도 이런 중대한 거래를 하루 만에 일사천리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을까. 아! 잘못 걸렸다.
“이 시간에 어떻게 오셨습니까?”
“제가 아무래도 지금 보이스피싱을 당한 것 같은데 신고 좀 할 수 있을까요?”
담당자는 흥분해서 말도 더듬는 나를 일단 자리에 앉혔다. 나도 모르게 속사포처럼 튀어나오는 상황 설명에 앞 문장 일부만 듣고도 형사는 웃으며 말한다.
“보이스피싱 맞습니다.”
“아니 왜 놀라지 않으세요. 이런 경우가 많아요?”
“네, 매일 서너 명 이상 찾아오시고 저희 어머니는 아들이 형사인데도 당했으니 말 다했죠. 돈은 몇 시에 보내셨나요?”
“오전에 한 번 오후에 한 번, 총 두 번 보냈어요.”
“시간이 많이 지났네요. 돈은 입금 후에 바로 빼버리기 때문에 통장에는 이미 없을 거예요.”
허탈했다. 내가 이렇게 정신이 모자란 사람이었나. 무슨 생각으로 의심도 없이 곧이곧대로 그들의 말을 믿었을
까. 도대체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여태 살아온 거지? 그래도 아들이 경찰인데 같은 사고를 당했다는 어머니 생각에 잠시 위로가 되었다. 진술서를 작성하면서도 손이 떨린다. 도대체 이런 사건이 왜 나한테…. 어찌할 바를 몰라 멍하니 허공을 올려다보고 있으니 형사는 그나마 금액이 크지 않아서 다행이란다. 최근 접수한 사건 중에 최대 4억 넘게 송금한 사람도 있다고 했다.
억대 사기보다는 덜하지만 나에게는 소중한 돈이다. 일 년 치 피땀 흘린 내 여행 자산이었으니까. 찬란하게 세운 여행 계획이 단박에 무너졌다. 나는 자동차와 주택에는 관심이 없다. 브랜드도 잘 모르지만 명품을 사는 데 돈을 쓰지 않는다. 패션은 스타일을 따지긴 하지만 유행을 모른다. 괜히 이동하기 불편하게 여행 중에는 멋도 안 낸다. 그러나 여행 자체를 위해서는 아낌없이 시간과 돈을 쓴다. 그렇게 오랫동안 혼자 지구별 보물찾기를 하듯 여행놀이를 하면서 살았다. 그리고 오늘 나는 일 년 치 여행 경비를 한방에 날렸다.
당분간 나에게 여행은 없다.
모아둔 자금이 날아갔다.
당분간 나는 날지 못한다.
멍하니 앉아 있지만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돌아가는 길에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보이스피싱 당한 것 같아.” “아니 왜? 이런 시국에 보낼 돈이라도 있었네. 도대체 그걸 의심도 못하고 보냈단 말이야? 바보같이.” 전화로 두 번 죽는 하루다.
자다가 새벽에 벌떡 일어났다. 목소리가 착해 보였던 청년이 반가운 목소리로 “대출이 완료되었습니다.”라며 전화를 해올 것 같았다. 다시 한 번 어제 주고받은 문자와 통화기록을 살펴보았다. 이 새벽에 혹시나, 해서 버튼도 눌러 본다. 신호는 간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분명히 카드사 콜센터 번호인데 전화가 걸리면서 화면이 또 이중분할된다. 불안해서 캡처해두려고 버튼을 눌러도 작동이 안 된다.
내 휴대폰에 뭔가 묘한 장치가 걸려 있는 게 분명하다. 순간 휴대폰 메뉴를 자세히 보았다. 낮에는 보이지 않
던 모르는 은행 로고가 좌측 상단에서 반짝거렸다. ‘이 은행은 내가 거래도 안 하는데 왜 앱이 깔려 있지?’ 클릭해보니 유효기간이 지난 나의 인증서가 열렸다. 이건 뭐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미심쩍은 마음에 어제 사건을 접수한 형사한테 문자를 보냈다.
‘제 생각에는 오늘 또 전화가 올 것 같은데 아침에 경찰서로 가서 그 전화를 같이 받으면서 수사에 도움을 드려도 될까요?’ ‘아마 전화는 안 올 겁니다. 그 전에 혹시 모르는 앱 깔린 게 있는지 확인하고 그것부터 삭제하세요.’ 그렇구나! 이 사건의 단서를 제공한 게 이 앱이었구나. 바로 파란색 은행 앱을 삭제했다. 그리고 다시 통화 버튼을 눌러보니 조금 전과는 다르게 정상 화면이 뜬다. 아, 허탈했다. 제대로 걸린 것이다.
휘청거리는 마음으로 길을 나선다. 예정된 점심 약속을 일찌감치 취소하고 마음의 여유를 찾으려고 애쓴다. 나름 잘 버틴다고 하는데 일그러진 표정은 숨길 수가 없다. 오늘 정해진 모든 약속을 취소하고 경찰서에 죽치고 앉아 사건이 해결되기만을 기다리고 싶다. 형사는 눈치를 챘는지 이제 끝났으니 나가보시라고 한다. 접수된 확인 서류를 들고 송금한 은행으로 가니 은행 직원도 당황한다. 이런 사건이 자주 있는 일은 아니라 접수하는 데 오래 걸리니 볼일 먼저 보시라고 한다. 모두 바쁘고 아무렇지도 않다. 나는 (마음은)바쁘지만 (몸이) 한가하다.
밤잠 줄여가며 열심히 사는 이유가 여행 때문인데, 이런 일을 당하고 나니 여행에 대한 의욕도 사라진다. 오늘
같은 날은 어디 카페 구석에 처박혀 술이나 한잔 마시며 마구 괴로워하고 싶다. 한숨만 나온다. 세상을 이렇게 몰랐던가. 이런 사기도 당해봤으니 이제 어른이 된 걸까. 조용히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니 그냥 내 갈 길이 보인다. 오늘도 만나야 할 사람들이 있고 해야 할 다른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다.
마음은 서울 지하철을 뱅뱅 돌면서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지만 전철로 서울 딱 반 바퀴를 돌고나니 정신이 제자리로 온다. 머리는 열 받고 몸은 피곤하나 잠이 온다. 졸다가 자다가 하면서 복잡한 마음을 재운다. 심하게 흔들거리는 느낌에 눈을 뜨니 전철이 한강 위를 지나가고 있다. 안개가 낀 건지 내 기분 탓인지 밖이 뿌옇다. 어제까지 베를린 같던 서울이 파리 날씨처럼 우중충하다. 전철로 만나던 도시 여행 감성은 어디 가고 괜히 날씨 탓을 한다.
‘오늘 날씨 왜 이래.’
목적지에서 내려 계단을 오르면서 다시 생각한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세상에 그냥 생기는 일은 없다. 모
든 일은 운명이고 하늘이 상황을 만드는 것이다. 나의 현재는 완벽했다. 더 부지런하게 살아야 하는데 잠시 게으른 욕심을 낸 것이 화근이었을까. 진심으로 솔직하지 않고 정직하지 않아서 생긴 일이다. 자신을 바라봐야 하지만 도시여행자는 하늘만 본다. 멀리 날아간 나의 여행티켓이 비웃고 있다.
3월인데 유난히 바람이 차다. 아직 꽃샘추위인가. 공기도 차고 손도 시리다. 뜨겁고 달달한 카페라떼 한 잔을 들
고 창문을 연다. 어머나, 눈이 오네. 갑자기 웬 눈?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단순한 여행자는 혼자 웃는다. 이런 날씨 기뻐해야 하나, 이런 기분 슬퍼해야 하나. 그렇게 서울의 오후는 쌓이지도 않을 거면서 기분 좋게 하얀 눈이 내린다. 찬바람에 흩날리는 눈을 보니 나의 일 년 치 여행시간이 눈가루처럼 사라지는 게 보이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