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첩첩산중>
"이유가 있어 마셔? 언닌 이유가 있어서 태어난 것 같애? 넌 이유가 있어서 섹스하니? 그냥 하고 나서 이유 붙이는 거야. 아니야?"
내가 경험한 모든 연애에서, "내가 왜 좋아?"라는 여자친구의 질문에 흔쾌히 대답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사랑의 마음은 나도 모르는 사이 특별한 이유 없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자친구의 기대하는 눈빛 앞에서 '그냥.'이라거나 '나도 모르겠어'라고는 차마 대답할 수가 없어서. 그때마다 나는 열심히 이유를 발명해야 했다.
'왜'라는 질문이 힘을 잃는 순간은 많다. 이유가 없었던 행동에 '왜?'를 들이댈 때 그렇다. "왜 축구선수가 되셨나요?", "왜 나랑 결혼했어?", "왜 선로에 몸을 던져 사람을 구하셨나요?", "헤어지자는 이유가 뭐야?", "왜 글을 쓰시나요?"... 거창한 질문 뒤에 누구든지 그럴듯한 이유를 대기는 하는데, 솔직히 잘 모르겠다. 진짜 그 모든 행동에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까. 하고 싶으니까, 할 만하니까 하는 게 사람 아닌가.
오늘의 대사는 영화 <첩첩산중>의 어느 술 먹는 장면에서 나온다. 미숙(정유미), 명우(이선균), 진영(김진경)이 술을 마시고 있다. 여러 이유로 심기가 불편한 미숙은 소주를 연신 들이켜고, 진영은 참다못해 핀잔을 준다. '너 왜 이렇게 술 마셔?!'
그 말을 듣자 미숙이 어이없다는 듯 소주잔을 움켜쥔다. "이유가 있어 마셔? 언닌 이유가 있어서 태어난 것 같애? 넌 이유가 있어서 섹스하니? 그냥 하고 나서 이유 붙이는 거야. 아니야?"
얼마나 많은 이유들이 성공을 과장하기 위해, 실패를 변명하기 위해, 마음이나 관계를 수식하기 위해 뒤늦게 붙었을까. <첩첩산중>을 보고 난 뒤, 한동안 위의 대사를 되뇌는 버릇이 생겼다.
"하고 싶으니까 했고, 할 만하니까 했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면, 나는 되도록 심플하게 대답하려 한다. 괜한 이유를 뒤늦게 지어내서 멋있는 척 하고 싶지는 않다. 미래의 여자친구가 "내가 왜 좋아?"라고 묻는다면, 어쩔 수 없이 그럴듯한 이유를 발명할 수밖에 없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