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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Dec 20. 2023

제, 제발 음식을 입에 넣고 얘기하지 말아요!

영화 <아노말리사>

영화: 아노말리사(2015)
제, 제발 음식을 입에 넣고 얘기하지 말아요!

우리는 언제나 상대방에 대해 잘 모를 때 사랑에 빠지고, 더 잘 알고 있을 때 이별한다. 이 순서에는 예외가 없다. 더 잘 아는 상태에서 사랑에 빠졌다가, 점점 모르게 되면서 헤어지는 경우는 없다.


알고 보니 생각보다 좋은 사람이 아니어서 헤어지게 되는 걸까? 잘 모르겠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 법이니, 나를 만나고 나서 특별히 더 나빠졌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애초 상대방에게 속았기 때문일까? 실제로는 까칠한데 다정한 척을 해서 사귀기로 했다거나, 실제로는 무식한데 똑똑한 척을 해서 만났다거나… 물론 그럴 수도 있는데. 나의 경우에나 내 주변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보통은 사람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변한다. 상대방을 감당하는 나의 인내심이 변한다.


우리는 사랑에 빠질 때, 상대방의 나쁜 습관이나 특성마저도 매력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퉁명스러움을 쿨함으로, 우유부단함을 사려 깊음으로, 예민함을 섬세함으로, 가벼움을 밝음으로 쉽게 혼동한다.


그런데 그건 정말 혼동이었을까? 상황에 따라 나의 해석이 달라진 거 아닐까. 상대방은 늘 같았는데 저 혼자서 쿨하다고 좋아했다가, 퉁명스럽다고 싫어했다가 자기 마음대로 아닌가. 좋다고 할 때는 언제고, 나중에는 그게 헤어짐의 이유가 된다.


영화 <아노말리사>의 주인공 ‘마이클 스톤’은 결혼생활을 포함한 모든 인간관계에 지칠 대로 지쳐있다. 그에게는 세상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 똑같이 보일 뿐 아니라, 목소리마저 한 가지로 들린다. 그러던 그가 출장지에서, 우연히 평범한 여자 ‘리사’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키가 작고, 통통하며, 얼굴에 흉터까지 있는 여자지만 사랑에 빠진 마이클은 개의치 않는다. 그녀의 얼굴만이 특별하고, 그녀의 목소리만이 생생하다. 죽어있는 자신을 구원해 주는 것만 같다.


‘리사’도 호의적이다. 유명 강연가인 마이클의 팬을 자처하며, 순순히 방으로 따라 들어오기까지 한다. 둘은 같이 술을 마시고, 서로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고, 깊은 대화를 나누다가, 로맨틱한 섹스를 한 뒤 잠에 든다.


다음날 아침, 마이클은 결혼생활을 정리하기로 한다. 리사에게 사랑을 고백하며 함께 살자고 제안한다. 리사는 확신 없이 머뭇거리는데, 열심히 설득한다. 그리고 리사가 마침내 알겠다고 대답을 한 직후. 벌써 마음이 달라진다.


그녀가 음식을 입에 넣고 말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지시하는 듯한 그녀의 말투도 묘하게 거슬린다. 주의를 주었는데도(주의를 주다니!), 리사는 계속 쩝쩝댄다. 마이클이 인상을 쓴다. “제, 제발 음식을 입에 넣고 얘기하지 말아요!”


그 처참한 변덕을 실시간으로 느끼면서 나는 허탈하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미친놈. 사랑한다며, 좋다며, 괜찮다며. 애초에 시작을 말지. 좋아하지나 말지. 사랑한다고, 괜찮다고 말하지나 말지.


모니터 속의 마이클에게 소리쳤다. 아니, 사실 나에게 외치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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