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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낯선생각 Oct 08. 2021

천상 글쟁이

  난 이번 책을 쓰면서 나의 글쟁이 인생을 돌아보았다. 글을 쓰며 살아왔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쭉 어릴 때부터 나를 보니 내 입으로 말하긴 부끄럽지만, 천상 글쟁이가 맞는구나 싶다. 나이에 비해 수많은 경험과 그에 따른 숱한 시련들을 겪어오면서 처음엔 나에게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걸까 생각했었다. 이놈의 사주팔자 때문인가 하기도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그 시련들은 나를 조금씩 단련시켰고 나에게 글을 쓰는 힘을 만들어주었다. 아무 문제 없이, 별 탈 없이 살아왔다면 과연 이렇게까지 글을 쓰고 싶었을까? 


한 번의 시련이 생길 때마다 나는 많이 아파했다. 그래서 눈물이 많은 아이로 자랐다. 어른이 되어서도 눈물이 너무 많아서 아주 여려빠진 사람으로 낙인되곤 했다. 하지만 이 눈물은 약해서 흘리는 눈물도 아니고, 무서워서 흘리는 눈물도 아니었다. 그저 아픈 세월에 대한 애도의 눈물 정도로 해두겠다.     


  그래서 비슷한 상황의 누군가를 보면 너무 마음이 아팠다. 나처럼 힘들겠지, 나처럼 아프겠지 하는 마음으로 오지랖을 부렸다. 그리고는 사람에 배신당하고 또 다른 아픔에 힘들어했다. 그렇게 커가는 거로 생각하면서 글을 썼다.     


  처음에는 아름다운 이야기만이 글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상처, 나의 아픔을 글로 쓰는 건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한 것 같기도 하다. 2015년 봄 정도 됐나 보다. 민찬이, 영준이 그림대회에 나가느라 따라갔다가 어린이 사생대회와 함께 여성백일장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너도 한 번 써봐”    


  같이 따라갔던 친정엄마가 여성백일장에 나가볼 것을 권하셨다. 그때 당시에는 마음 아픈 일이 있던 시기라 어떤 글도 쓸 수 없다고 생각했고, 무엇보다 그래도 나름 방송작가인데 백일장에 나가는 게 맞을까 하는 생각이 제일 컸다. 어쩌면 자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네가 작가니? 책을 썼니, 뭘 썼니? 아무도 네가 뭐를 하는지도 모르고 작가라고 하기도 그래.”    


  사실 엄청 충격적인 말이었지만, 그 말도 맞았다. 내가 책을 쓴 것도 아니고 방송 10년 했다고 해도 내가 무슨 작가인가. 내 글이랄 것 하나 반듯하게 없고, 늘 방송 스태프의 한 명뿐인 이런 내가 무슨 작가인가. 자존감은 바닥을 쳤다.    


  “애들 그림 그리려면 시간이 필요하니 그 사이에 글 하나 써봐라”    


  엄마의 말이 자극되어 원고지를 받아왔다. 시제는‘봄’. 어쩌면 뻔한 시제에 나는 어떤 글을 써야 할까. 그래, 지금 아픈 내 이야기를 쓰자. 어차피 지금 아름다운 이야기 따위는 나오지 못할 상황이니 그냥 속풀이나 하자. 그래서 나는 ‘내 삶의 봄’을 기다리는 내용의 글을 썼다. 당시 나는 재판으로 많이 지쳐 있었다. 본의 아니게 어떤 사건의 증인이자 피해자가 되어 1년이 넘게 재판을 했다. 얼마나 아프고 힘들고 지쳤는지 모른다. 뭐든지 끝까지 가면 피해자도, 가해자도 없다. 결국은 모두 피해자가 된다. 사람들이 무서웠고, 사람들의 말이 무서웠고, 사람들의 시선이 무서웠던 그런 시기였다. 재판 과정을 나름 소상하게 적었다. 누군가에게 나 너무 힘들었다고 이야기라도 하듯이 엄마한테도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한 줄 한 줄 써 내려갔다.    


  나에게 묻는 것들이 하나같이 나를 후벼 파는 듯했다. 당장 달려가서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수술한 지 얼마 안 된 내 목에선 어떤 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저 눈물만 흘렸다. 법정의 사람들은 이런 나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할까…. 재판은 그 사람의 법정 구속으로 끝이 났다. 하지만 끝까지 미안하다는 말, 그 한마디를 듣지 못했다. 그 한마디 듣고자 시작했던 기나긴 재판이 그렇게 끝났다.


  법원에서 나오는 길에 정말 오랜만에 바람이 느껴졌다. 볼을 스치는 바람이 따스했다. 봄이구나. 이제 봄이 왔구나. 계절은 돌고 돌아 다시 봄인데 이제 내 인생에도 봄이 오려나. 

내 걸음걸음에 봄바람이 차였다. 괜시리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 봄이 온 거다. 내 인생에도.    


  그땐 1시간도 안 되는 시간에 원고지에 갈겨쓰다시피 적어내고 다신 본 적 없는 글이라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이런 느낌이었다. 처음으로 아름답고 행복한 이야기가 아니라 아프고 힘들었던 이야기를 글로 써 본 것이. 그리고 며칠이 지나고 전화를 한 통 받았다.     


  “하미라 씨 되시죠? 이번 참가하신 여성백일장에서 장원으로 선정되셨습니다.....”    


  뒷말은 들리지도 않았다. 놀라웠고, 신기했고, 기분 좋았다. 세상에 장원이라니.    


  “엄마, 나 여성백일장 장원이래!”    

  “이제 진짜 작가 됐네. 축하해”    


   진짜 작가. 2015년 처음으로 내 이야기로, 내 이름을 건 작품이 전시되었다. 그리고 내 이름을 가슴에 붙이고 상패를 받고, 꽃다발을 받고 신문에도 났다.     


  “여성백일장 하미라 장원”    


  이렇게 커다랗게 지역 신문에 실리고 엄마 말처럼 진짜 작가가 되었다. 그리고 자신감이 생겨서 바로 다음 해, 소설 <환상의 섬>과 스토리텔링 여행책 <걷다가, 쉬다가>를 썼다. 


천상 글쟁이는 글을 쓰고 살아야 사는 것 같다. 글쟁이가 글을 쓰지 못하는 순간, 팔다리 묶어놓는 것과 같다는 걸 매번 느꼈다. 그리고 내 글을 읽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이 글쟁이를 행복하게 만들고 글을 쓰는 힘을 준다.


  글쟁이에게 글은 밥이고, 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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