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부터 스토리텔링에 관한 강의를 시작했다. 스토리텔링 강의를 할 때면 나는 꼭 강조하는 것이 있다. 모든 사물, 사람들에게서 의미를 발견하도록 하라는 것이다. 하나의 사물이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나에게 하나의 의미가 되었을 때 진짜 스토리텔링이 시작될 수 있다고 말이다. 김춘수의 詩‘꽃’처럼.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의 ‘꽃’ 중에서」
우리 삶은 모든 것이 스토리텔링으로 연결된다. 나의 명함이 ‘하미라 작가’였다가, ‘낯선생각의 글쟁이 하미라’였다가, ‘하미라 주무관’이었다가, ‘하미라 SM'이 되는 많은 변신을 거칠 때마다 나의 이야기를 하나씩 늘어난다. 모든 ’내‘가 다른 의미이기에 내 삶이 더욱 풍성해지고 있는 것이다.
문수실버복지관에서 어르신들과 스토리텔링 수업을 하고 그 분들의 이야기로 책을 만들었다. 2018년과 2019년 두 번이었는데, 2018년에는 주제 잡기가 쉽지 않았다. 어르신들과 깊은 이야기도 할 시간이 없이 글쓰기란 무엇인가에 대한 짧은 강의 후, 마구잡이 글을 써내야 하는 판이니 쉬울 리가 없었다. 우선을 글을 다 받은 후에, 이건 되고 저건 안 되고 수정하고 또 수정하고 후반작업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책은 겨우 완성 됐지만 아주 고된 작업이었음은 확실하다.
2019년 스토리텔링 수업은 아예 방향부터 바꿨다. 글을 무작정 쓰는 것이 아니라 우선 어르신들과 글쓰기와 말하기, 스토리텔링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부터 시작해서 글감 찾기, 나에게 의미 있는 기뻤던 이야기, 슬펐던 이야기, 재미있었던 이야기,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어르신들의 속에 있는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돌아가면서 한명씩 발표도 시켰다. 글을 쓰고, 또 글로 읽는 것과 자신의 감정을 고스란히 실은 말의 울림은 다르기 때문이다. 어르신들은 앞으로 나와서 처음엔 다 부끄러워 하셨다. 하지만 떨리는 목소리로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가면서 점점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눈물 나는 이야기, 배꼽 잡는 이야기, 때로는 아련한 이야기도 함께 했다. 어르신들과 함께 울고 함께 웃었다.
어르신들 한분 한분을 제대로 알면서 어르신들의 삶에서 ‘의미’있는 무언가를 찾아낼 수 있었다. 우리가 ‘나만의 의미’를 찾는 순간 진짜 스토리텔링은 시작되었다.
「그를 처음 만나는 날이었다. 다방의 구석진 자리에 앉아있었다. 차 한 잔 하자는 몇 번의 제의를 받고 어렵게 약속을 잡았다. 주변 사람이 보면 소문이 나고 어른들이 이해 못하므로 조심스러웠다. 자리에 앉아 인사를 하고 몇 마디 주고받았다.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 주위를 돌아보자 조금 떨어진 테이블에 잘 알고 있는 동네 어른이 보였다. 나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몸을 돌려 최대한 동네 어른의 눈에 띄지 않도록 자세를 바꾸었다..... (중략) - 강영숙 어르신
(중략)..... 지금은 정년퇴직하고 노인복지관 등에서 그동안 하고 싶었던 사군자, 캘리그라피 등을 배우고, 자원봉사활동을 하면서 행복하고 보람된 날들을 보내고 있다.
홀로 풍찬노숙하던 난 이제 평생을 희생 준 아내가 있고, 듬직한 아들, 상냥한 며느리, 토끼 같은 손자가 둘이며, 아빠를 끔찍이 사랑하는 효녀딸과 나라를 지키며 산 군 장교 출신의 사위, 나보다 키가 훨씬 큰 중학교 1학년 외손녀가 있다.
그리고 해질 때 돌아갈 아늑하고 따스한 집이 있어 행복하다.
이제야 사는 게 사는 것 같다. 소소한 행복을 느끼며. - 김길용 어르신
불같이 살아오신 어머님의 삶을 그리며 내일 모레면 어머님 돌아가신지 3년째 되는 기일입니다. 37세에 남편을 사별하고 6남매를 키우시면서 힘든 고난과 어려움을 견디면서 현명하게 밝게 살아오신 어머님 온갖 고통을 다 참아가면서 오로지 자식을 위하여 한평생을 희생하신 어머님, 팔순이 접어들면서 잦은 병환에 끝내 몸을 움직일 수 없어서 요양병원에 모시기로 형제 모두 합의했습니다.
몸을 움직이지 못하시니 밥도 손수 못 잡수시고 남의 도움으로 밥을 잡수시니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날이었겠습니까? - 김순옥 어르신
그리고 당시 연세가 아흔 둘이셨던 박용갑 어르신의 글은 진짜 어떤 글보다도 훌륭했다.
「작년까지는 25평 아파트에서 혼자 살아왔다. 늙으니 거동도 불편해지고 혼자 살기가 점점 불편해져가니, 큰 아들이 나를 혼자두기가 불안했는지 지 집으로 오라고 해서 금년 들면서 아들집으로 이사를 왔다. 아들과 같이 사는 것이 처음이라 합가하고서는 왠지 조심스럽고 어색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고, 아들과 며느리도 물론 많이 불편했겠지. 혼자서 내 뜻대로 자유롭게 살다가 아들과 며느리와 호흡을 맞추려니 여간 힘이 드는 것이 아니었다. 어색한 점이 많았다. 한동안 서먹서먹하기도 했다.
자유롭게 각자의 생활을 하다가 애비와 자식이라는 계층의 차이를 단기간에 합리화 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겠다는 것을 느꼈고, 자유분방하게 혼자 살아온 습관을 시정하는데 시간이 필요했다.
효자는 부모 입에서 나온다는 말을 되새겨보았다. 모든 것을 내 탓으로 치부하기로 하고 마음을 고쳤다. 본래 내 자식은 어질고 착한 성품인데 내 자신에게 잘못이 있어서가 아닌가 하고 고민도 많이 했다. ......(중략) - 박용갑 어르신
어르신들의 글을 살아있었고, 어르신들의 글 속에서는 모두 청년이고 청순한 소녀였다. 그 삶을 들여다보며 같이 웃고 운 시간이 3개월이 넘었다. 마지막 수업에는 어르신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말씀하셨다.
“우리 선상님, 우리 선상님은 꼭 엄마 같다. 어떻게 이렇노”
“선생님 덕분에 다시 젊어진 것 같고,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아서 진짜 고맙십니데이”
어르신들 앞에서 감히 내 삶의 이야기도 털어놓았었다. 괜한 이야기 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내 손을 꼭 잡아주던 어르신들, 여전히 다들 잘 계시는지.
나는 꿈꾼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 속에서 의미를 찾아내기를, 그리고 그 속에 자신을 봤을 때 누구보다 행복한 기억들이 가득 하기를. 그래서 나는 오늘도 강의를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