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절실한 크리스천이셨던 것 같다.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아이들에게 늘 웃는 모습을 보여주셨고, 우리를 데리고 봉사 활동도 다니셨다. 나의 봉사 활동의 첫 시작은 이향숙 선생님과 함께였다. 그 후, 나는 고등학교도 봉사동아리에 가입해 활동했고, 대학을 가서도 ‘한벗’이라는 봉사 소모임 활동을 했으며, 작가가 되고서도 봉사 활동을 하는 동호회들과 밀접한 접촉을 가지며 아이템을 찾아냈던 기억이 난다.
어쨌든 이향숙 선생님은 특별한 분이셨다. 작은 키에 동그란 눈동자가 너무나 선명하게 기억나는, 선생님 덕분에 나는 지금의 작가로 사는 삶을 살고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중학교 시절, 교내 춘계백일장 대회가 매년 열렸다. 선생님의 권유로 춘계백일장 대회에 참가했다. 글감은 친구네 집에 가서 농사일을 도왔던 경험을 토대로 글을 썼다.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주말에 친구네 집에 놀러 갔었다. 생각보다 먼 거리에 있었던 친구 집은 농사를 지었다. 추수가 끝나가는 어느 날이었는지, 볏짚을 가득 세워놨던 기억, 그걸 열심히 들쳐 안고 옮겼던 기억, 그 안에서 볏짚에 뒹굴며 놀았던 기억, 생전 처음 먹어보는 새참의 꿀맛 같은 기억, 해 질 녘의 아름다운 석양까지 모든 게 꿈같은 어느 날을 적어 내려갔다. 내가 쓴 글이었지만 정말 잘 적었다고 생각했던, 우스운 기억도 난다.
그 글은 교내 춘계백일장 대회에서 장원을 안겨주었고, 나의 자신감은 아마도 머리 꼭대기에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교무실로 부르셨다.
“미라야, 너 추수하고 모내기의 차이를 혹시 모르니?”
“네…?”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 모든 글의 내용은 분명 추수를 하고 난 상황인데 마지막 나의 글에는 ‘모내기’라는 글자가 너무나 선명하게 박혀있었다. 마른 볏짚을 나르는 일이 모내기라니…. 아무리 중학생이고, 아무리 농사일을 해본 적 없는 학생이라지만 추수와 모내기도 구분을 못 하다니. 너무 부끄러워서 숨고 싶었다.
장원이라는 상장 속에 적혀 있던 <.... 자신의 느낌을 진실하게 표현하였으며....> 라는 문구가 혹, 나의 이런 무식함마저 끌어 안아준 고마운 문장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홍당무가 된 나에게 선생님은 추수와 모내기를 헷갈린 것 같다고 하시며 이 단어를 고쳤노라 하셨고, 이어서 나에게 한 마디를 더 해주셨다.
“미라야, 너는 글을 잘 써서 글로 먹고살겠다. 정말 잘 쓰네.”
어린 시절의 경험은 어른이 된 후에도 많은 것들에 영향을 미친다. 나는 선생님의 이 한 마디에 글을 쓰는 일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겁내지 않게 되었다. 사실 선생님의 칭찬은 사소했을 수 있으나 이것이 아이에게는 얼마나 큰 힘이고, 응원이고, 격려였는지 모른다.
삶에 찌들어 힘들어 쓰러질 것 같아도 글을 쓰는 일이 행복한 이유가 이때 얻은 자신감 때문이다. 그리고 ‘추수’와 ‘모내기’도 모르던 무식함을 절대 잊지 않고 항상 단어를 확인하고 고민하고 생각하며 글을 쓰게 되었다. 단어 하나로 우리는 글을 써 내려 가기도 한다. 단어들을 나열해 둔 채, 살을 덧붙여 가며 글을 쓰다 보면 어느새 한 문장이 완성되고, 한 문단이 완성되고, 하나의 글이 만들어진다.
가끔은 섬세하고 정확한 표현을 위해 단어를 찾아 나설 때도 있다. 그리고 그것이 새로운 원동력이 되어 글을 이끌어 가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글을 쓴다는 것은 나와 싸움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난 나와의 새로운 만남이라고 본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잘 모른다. 누구보다 제일 잘 알 것 같지만 사실 절친보다 나 자신을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잘 안다고 말하고 싶겠지만 생각해 보라. 내가 가장 즐거웠던 때가 언제였는지, 내가 가장 슬펐던 때가 언제였는지, 또 내가 가장 많이 화가 났을 때는 언제였는지를 다 알고 있는지. 나는 당시 경찰이 되고 있었다가, 군인이 되고 싶었다. 뭔가 제복을 입고 멋진 모습이 부러웠던 것 같다.
그런데 이향숙 선생님의 한 마디로 내 꿈이, 인생이 달라졌다.
내가 가장 잘하는 것이, 아니 잘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 느낌이었고, 나는 언제 가장 행복한 사람인지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하루는 우리 큰 아이 민찬이가 수학을 못 해서 담임선생님께 연락이 왔었다. 아직 저학년이었던 때라 큰 걱정 없이 본인이 하고 싶은 것을 격려하고 지지해 주던 때였지만 이런 전화를 받으니 화가 슬 고개를 들었다.
‘아니, 저학년 수학이 어려워 봤자 얼마나 어렵다고 이걸 못해?’
씩씩거리며 민찬이에게 수학 문제를 풀라고 시켰다. 뺀질뺀질하게 앉아서 눈으로 수학 문제를 보고만 있는 아이를 보니 더 화가 났다.
“너, 문제 안 풀어??!!”
“풀고 있잖아. 312.”
“너 무슨 수학 문제를 눈으로 푸니? 두 자리 곱셈을 어떻게 눈으로 풀어?!”
화를 내며 문제와 답안지를 봤는데 ‘312’가 정답이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어떻게 답을 맞혔지?”
“눈으로 보고 머리로 계산했는데.”
초등학교 3학년에게 나올 수 있는 말인가? 머리로 두 자릿수 곱셈을 하다니?
“민찬이 완전 수학 천잰데?”
진심으로 아이에게 그렇게 말하고 몇 문제를 더 풀었다. 역시나 암산으로 너무나 쉽게 풀어냈다. 나는 진짜 어이없을 정도의 아이 실력에 놀라 끊임없이 ‘천재’ 소리를 운운하며 칭찬했고 그 후 민찬이는 정말 수학의 귀재가 됐다. 6학년이 된 지금도 죽어라 공부는 안 하는데 수학만큼은 100점도 받는 멋진 청년이 되어 가고 있다.
이 또한 내가 했던 ‘너는 수학을 정말 잘하는구나’라는 한 마디의 힘이었다고 감히 자신한다. 아이들에게 어른들의 한 마디는 그 아이의 인생을, 운명을 바꿀 수도 있다.
잘 산 인생이라는 것은 출세하고, 돈벼락 맞는 그런 인생이 아니라, 쓴맛 단맛 다 보면서 그래도 견디고 끝까지 사는 인생이라고 한다. 글을 쓰는 일이 꿈이 된 이후로, 쓴맛 단맛 다 보며 나는 이 길에 견디고 살아가고 있고, 앞으로도 살아갈 것이니 나는 지금까지는 아주 ‘잘 산 인생’인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