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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낯선생각 Oct 08. 2021

기획예산실 공보계 글쟁이

 내가 ‘문화공작소 낯선 생각’을 열어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누군가가 구청에 홍보 관련 임기제 공무원을 뽑는다며 지원해 보라고 했다.     


   “공무원?!”    


 상상도 해보지 않았던 일었다. 내가 공무원을 한다는 건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내가 공무원을 하면 어떨 것 같아?”    

  “니는 3개월도 안돼서 뛰어 나올 끼라”

  “답답해서 거기에 있을 수 있겠나?”    

  “그치? 그렇겠지?”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은 모두 콧방귀를 꼈다. 나와 공무원은 전혀 어울리지 않으며 나는 답답한 그곳에서의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나올 것이라고 확신했다. 사실 그 말도 맞는 것 같았다. 내가 아는 공무원이라는 직업의 생활은 꽉 막힌 통 안에 있는 느낌이었으니까. 하지만 가족들에게 이야기를 하자 난리가 났다.    

 “그런 게 있으면 당장 가야지! 무슨 고민을 하노?!”

 “남들은 하고 싶어도 조건이 안 된다는데 니는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나? 당장 가라!”    


 가족들은 뒤도 돌아보지 못하게 강력한 어조로 말했다. 사실 우리 가족들은 나랑 성향이 좀 다르다. 사업을 하는 집에 사업가들과 글을 쓰는 프리랜서 글쟁이는 전혀 궁합이 맞지 않다. 그래서 내가 하는 일이라면 우선 쌍수를 들고 말리고 본다. 그것 해도 안 되는 일이라며 나의 들뜬 마음에 찬물을 끼얹는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면 가족들의 말이 맞았던 게 더 많기는 하다. 그래서 이번에는 가족들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하나도 반항하지 않고.     


 그렇게 원서를 넣고 1차 서류 합격을 하고, 2차 면접까지 봤다. 방송을 하면서 울산에 대해서는 훤히 알고 있었고 지역 현안이나 여러 문제가 되는 사안들에 대한 고민도 해본 적이 있던 터였다. 면접관들의 날카로운 질문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하나하나 또박또박 대답했다. 스스로 아주 대견하다 생각했던 순간이다. 그렇게 원서를 넣고 면접을 보고 합격까지 2달도 걸리지 않았다. 2016년 10월 1일자로 구청의 7급 임기제 공무원이 되었다. 처음(?)으로 가족들에게 자랑스러운 딸이 된 날이다.   

    

  공무원이 하는 일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일복 많은 나는 신기하게도 모든 것을 일찍이 체험할 수 있었다. 내가 임용이 되기 전날부터 세상은 태풍‘차바’의 영향으로 어두컴컴했다. 2016년 10월, 태풍 ‘차바’는 대한민국을 강타했다. 특히 남부지방과 제주도에 많은 비와 강한 바람으로 엄청난 피해를 주었다. 지금까지 10월에 한국에 영향을 미친 태풍 중 가장 강력한 태풍이었다고 한다. 특히 울산은 태풍이 오기 불과 얼마 전, 이미 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터였다. 차바는 사망자 7명, 실종자 3명, 피해총액 약 2,150억 원을 남기고 사라졌다. 마치 영화 ‘해운대’의 한 장면처럼 무서운 광경들을 증거로 남긴 채.     


  울산 북구와 울주군이 특별재난구역으로 선포될 정도로 울산의 피해는 심했다. 엄청난 폭우가 내려 곳곳에서 침수피해가 발생했고, 태화강은 홍수경보가 내려졌다. 태풍이 지나간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티 없이 맑기만 했지만 땅의 사정은 달랐다. 엉망이 된 태화강과 마을 곳곳을 치우는 것은 공무원들의 몫이었다. 처음 알았다. 공무원이 비상이 걸리면 언제고 뛰쳐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글을 쓰러 들어왔는데....라는 생각은 부질없었다. 비상이 걸리면 예외가 없었다. 전부 총동원되어 아수라장이 된 우리 지역을 최대한 빨리 원상 복구시켜야 한다. 그렇게 출근하고 바로 다음 날부터 난 비상소집 당했고 넓디넓은 태화강을 청소하고, 동네 곳곳을 청소했다. 장화를 신고, 뻘이 된 곳을 걸으니 다리가 땅에 붙어서 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렇게 일주일을 청소만 하다 보니 앞이 어질어질 했다.     


  “하주사님는 복도 많네요. 이런 것도 바로 경험하고. 난 10년 공무원하면서 처음인데.”    


 그랬다. 흔한 일이 절대 아니었다. 1959년의 태풍 ‘사라’나  2003년 태풍‘매미’와 같은 급의 태풍이었다고 하니 말은 다 한 거다. 자연재해가 일어나면 다들 도망갈 때, 반대로 움직이는 것이 공무원이라는 것을, 눈이 오면 “와~ 눈이다!”하고 좋아할 것이 아니라 ‘또 비상군이군!’하면서 좋아하지 않게 되는 것이 공무원이라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태풍 ‘차바’로 인해 나의 공무원 시작은 험난했지만 2주 정도가 지나자 안정을 찾고 본래 나의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주 2회 새벽 5시에 출근해서 신문자료 스크랩하기, 구청장의 연설문이나 기고문, 방송 인터뷰 대본과 각 부서의 기고문 및 행사 시나리오, 보도자료, 구청 페이스북 관리, SNS 서포터즈 관리 및 교육 등이었다.    


 글을 쓰는 건 원래 재미있는 일이었는데 구청에 가서는 점점 재미가 없어졌다. 똑같은 행사의 시나리오, 똑같은 행사의 연설문, 비슷한 내용의 인터뷰 내용들, 보도자료……. 내 생각은 절대 들어가서는 안 되고 오로지 ‘구의 방향’에 맞추어 써야 하는 것이다. 꼭두각시가 된 느낌이 들었다. 이래서 날 잘 아는 이들은 ‘3개월을 못 버틴다’에 한 표를 던진 거겠지?


그런 생각이 드니 이를 악물고 견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사전에 포기란 없다.  

다행히 기고문은 내 생각을 나름대로 펼칠 수 있어서 정말 좋았다. 그리고 처음 깨달았다. 나는 논리적인 글쓰기가 어쩌면 더 맞을 수도 있겠다. 딱 떨어지는 주장을 내뱉는 기고문이 너무나 매력적이라 꽤 많은 기고문을 썼다. 종종 자발적으로 써서 해당부서에 넘겨드렸다.     


  그동안 방송작가로, 기획자로, 강사로 갈고 닦은 실력 탓에 구청에서 하는 일들은 전부 자신 있는 일들이었다. 다만 가장 어려웠던 건 끊임없이 서류화 시켜야 한다는 것. 서류 작업은 지금 생각해도 나에게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단순히 글을 써서 넘기는 것이 아니라 업무시간외 작업을 하고도 서류를 제출하고 밥을 먹어도 서류를 제출하고 월차라도 쓸려고 하면 몇 단계를 거쳐 승인을 받아야 하고,   

  

  “우리는 글은 못써서 이렇게 하주사님이 도와주시니 숨을 쉴 것 같아요.”  

  

 그래도 많은 주사님들이 나를 찾아주시고, 도와줘서 고맙다는 말을 들을 때면 이 일을 하는 보람이 느껴졌다. 방송 인터뷰를 할 때도 방송관계자들의 심리는 누구보다 잘 아니 문제도 척척 해결하고 내가 생각해도 ‘척척박사’같았다. 우리 구를 담당하는 기자들과도 아주 친하게 지냈다. 원래 알던 사람들이라 더욱 편했다.  

   

  구청 페이스북은 관리 하에 ‘딱딱하고 지루함’을 벗어던지고 조금은 과격한 변화를 시도했으며 그런 중에 과장님께 욕도 먹긴 했지만, 결론적으로 방문율도 높아졌고, 구에서 운영하는 SNS 서포터즈는 꾸준한 교육을 통해 SNS 활용 능력은 나날이 발전했다. 구청에서는 점점 더 많은 실적을 요구했고, 공무원의 사고는 확 바꿀 수는 없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많은 공무원들에게 총애를 받고 있다고 생각했던 나는 한순간 그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2년 후, 지방선거가 있었고 나는 본의 아니게 새로운 길을 찾아가야 했다. 버티고 싶었지만 ‘왕따’가 그렇게 힘든 건 줄 처음 알았다. 결국 7급 공무원으로 2년을 버티고 다시 프리랜서 작가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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