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낯선생각 Oct 08. 2021

매일  매일 글쓰기

라디오 작가

  TV 프로그램 구성작가는 시간의 제약을 받으면 솔직히 조금 힘들어진다. 물론 어떤 프로그램을 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일 욕심이 많았던 나에게 결혼과 임신은 작가로서의 모든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임신하고 배가 점점 나오기 시작하면서 어디 돌아다니기가 힘들었다. 그러면 섭외를 하러 다니기도 힘들고, 촬영을 따라 나가는 것은 오히려 방해되는 수준이 되니 여간 민폐가 아니었다. 그래서 잠시 방송을 쉬어야겠다고 결심했고, 태교에 전념했다.    


  그렇게 민찬이가 태어나고 다시 하고 싶었지만, 젖먹이를 두고 다시 방송한다는 게 쉽지 않았다. 이 어린 아가를 데리고 다닐 수도 없고 맡길 수도 없고, 시간이 일정치도 않고. 그렇게 방송작가를 다시 하겠다는 꿈은 점점 멀어졌다.    


  아이를 둘은 낳아야 한다는 생각과 키울 때 같이 키우자는 생각으로 민찬이, 영준이를 연년생으로 낳았다. 그렇게 낳지 않으면 다시 아이를 낳고 싶은 생각이 사라질 것 같았다. 그리고 다시 방송을 조금 했다. 둘을 키우면서 방송작가를 하는 일은 절대 쉽지 않았다. 구성안을 쓴답시고 앉아 있어도, 섭외라도 할라치면 옆에서 우는 젖먹이들. 촬영을 따라 나가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아이 둘을 낳고 아줌마가 되어버린 내 모습이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거부했다. 글은 쓰고 싶고 몇 년간 해왔던 구성작가 일은 버거웠으니 이제 일마저 할 수 없는 건가. 

다른 경력 단절 여성들처럼 나 역시 경력이 단절되고 아이만 키우다가 그렇게 아줌마가 되어 가는 건가 하는 생각에 우울감이 깊어질 무렵, 라디오작가를 구한다는 이야길 들었다.


울산에 교통방송이 생기고 라디오작가가 여럿 필요한데 울산에서 작가를 구하기 힘들다며 라디오도 해보지 않겠냐고 제안이 들어왔다.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지만, 라디오는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도전해 본 적이 없었기에 겁이 났다. 할 수 있을까…? 내가 할 수 있을까…? 배운 적도 없는데…?    


  사실 따지고 보면 구성작가를 시작할 때도 나는 큐시트가 뭔지 모르고 시작했던 내가 아닌가? 그러면 이제 7~8년이 다 된 구성작가가 그 정도 눈치 없을까? 이런 자기 합리화로 과감히 도전했다. 그리고 라디오작가에 합격했다.    


  라디오의 세계는 달랐다. 확실히 달랐다. 눈으로 보는 것이 대부분인 TV프로그램에 비해 글의 힘이 자치하는 비율이 80%였다. 같은 프로그램을 하는 MC와 호흡을 잘 맞춰서 글을 뚝딱뚝딱 써내는 일, 구성작가는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특색 있는 작업을 한다면 라디오는 1-2시간 안에 예능 작가도 되고, 드라마 작가도 되고, 쇼 작가도 되어야 하는 신기한 작업이었다. 그리고 선곡을 하는 일도 신나는 일 중의 하나였다. 음악을 듣고, 글을 쓰고, 어느 순간 글을 통해, 음악을 통해 많은 것들이 치유 받는 느낌이었다.     


  TV 프로그램은 전파를 통해 일방적으로 시청자들에게 보여준다. 피드백은 아주 적극적인 일부의 시청자들에 의해 게시판에 한두 개의 소감 혹은 질문으로 이루어지고 시청자 위원회 등을 통해 지금 프로그램이 자기 방향으로 잘 가고 있는지 확인하곤 했다.    


  그런데 라디오는 실시간 청취자들의 참여로 많은 것들이 이루어졌다. 특히 교통방송이라는 특징 때문에 실시간 교통정보를 전해주고 그것 때문이라도 버스나 택시 운전하시는 분들이 애청자가 되어 주셨다. 그리고 실시간 문자는 청취자들의 반응을 바로바로 알 수 있었으며, 신청곡도 받아서 선곡해 둔 곡 대신에 바로 틀어드리기도 했다. 이런 소통되는 느낌이 정말 좋았다.  


  물론 TV프로그램은 촬영한 분량이 넘치면 조절할 수가 있지만, 라디오는 정말 큐시트대로 대본의 길이가 딱 맞아 떨어져야 방송사고가 생기지 않았다. 원래 대본을 쓸 때 소리를 내 대본을 체크하며 쓰지만, 라디오는 그 작업이 더 중요했다. 읽는 속도와 분량을 조절해 시간까지 체크하면서 대본을 썼다. 내가 그 MC가 생각하고 가끔 애드리브까지 넣어가며 최선을 다한 대본은 대부분 시간이 정확히 맞아 떨어졌고 MC도 PD도 읽기 좋은 대본이라며 칭찬을 했다. 이제 구성작가로서가 아니라 라디오작가로서 자리를 잡아가는 느낌이 들어서 참 뿌듯했다.      


  몇 개월이 지나고 라디오 방송 개편이 있었고, 각 프로그램을 맡은 PD들을 대상으로 같이 일하고 싶은 작가 1순위, 2순위를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모든 프로그램 PD들이 1순위로 일하고 싶은 작가로 내가 뽑혔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나에게 프로그램을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항상 PD들에 의해 선택만 당해오던 작가라는 자리에서 내가 프로그램을 선택할 수 있는 위치까지 왔다는 사실에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이 요동쳤다.     

  인간을 위대하다고 하는 이유는 자신의 행동을 조절할 수 있고 그 행동으로 남에게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공한 사람들의 특징 중의 하나가 뛰어난 재능보다 그들이 누린 특별한 소통의 기회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많았다는 것이다. 특별한 소통의 기회라는 것은 남의 말을 잘 경청해주다가 우연히 주고받은 말 한마디로 아이디어를 얻고, 그것을 사업에 반영하여 성공한 것이다. 빌 게이츠나 록펠러처럼 말이다.   

 

  내가 성공한 사람은 아니지만, 나도 MC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PD들의 의견에 귀 기울이고, 청취자들의 사연과 이야기에 귀 기울이면서 많은 아이디어를 얻었다. 모든 이들에게 마음의 창을 열고 나눔의 소통을 하고자 했을 때 그 진정성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소통하는 것, 그것이 모든 일의 시작이다.     

이전 09화 365 중독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