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국 면접담은 앞에서 조금 적었지만 나는 아주 독특한 케이스였고, 보통은 방송아카데미를 나와서 방송국에 들어와 막내 작가로 일을 시작한다. 막내 작가의 일상은 다들 비슷하리라 생각한다. 아직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으니 선배 작가들로부터 배워야 한다. 하지만 선배 작가들이 이 막내 작가를 가르쳐야 할 의무는 없으나 일손이 부족하니 툭툭 하나씩 시키면서 가르침을 받는 것이다. 어떤 사수를 만나느냐에 따라 막내 작가는 자신의 스타일을 만들어가게 된다.
나는 방송의 ‘ㅂ’자도 모르던 그저 학생이었다. 대학교도 졸업하기 전에 방송국에 들어가 작가라는 명함은 가지고 있었으나 아는 게 없었다. 그래서 내 주특기인 무조건 열심히 하기를 해보기로 했다.
막내 작가의 일상을 따라가 보자면, 첫 방송이 시작되기 1시간에서 1시간 반 전에 가장 먼저 출근을 해서 첫 방송 준비를 돕는 걸로 하루가 시작된다. 그 당시 첫 방송은 <생방송 아침을 연다>라는 데일리 프로그램이었는데, 오전 7시 20분 경에 시작하는 방송이라 늦어도 6시에는 출근을 해야 했다. 혹시나 생방송 준비로 선배 작가가 숙직실에서 잠이라도 들어있는 날에는 선배 작가를 깨우는 것도 막내 작가의 할 일 중에 하나였다.
그리고 선배 작가가 밤새 사투를 벌인 대본과 큐시트 등에 클립을 끼우고 촬영 스텝의 이름을 써서 중앙 테이블에 쫙 진열해둔다. 그러면 각자 자신의 이름이 적혀있는 대본을 가져간다. 생방송이 시작하기 30분 전까지 출연진은 다 대기 상태가 되도록 일일이 전화해서 확인한다. 생방송을 시작하기 5분 전까지 스텝들은 자기 자리를 찾고, 선배 작가와 막내 작가는 부조정실에 PD 뒤에 앉아 긴장 상태를 유지한다.
그렇게 생방송이 끝나면 막내 작가는 스텝들의 대본을 일일이 수거하고 (그러지 않으면 대본이 아무렇게나 뒹굴어 다니는 참사가 일어난다) 이면지 통에 살짝이 넣는다. 그렇게 전쟁 같은 생방송이 끝나면 단체로 아침을 먹으러 가는 경우가 많다. 방송이 마쳐봤자 8시 30분도 되지 않기 때문에 새벽같이 나온 사람들은 그 날 하루를 버틸 에너지를 얻어야 한다.
그리고 작가실로 다시 돌아오면 다른 선배 작가들이 출근을 하고 일을 시작한다.
“ 오리고기 찍으러 갈 거야. 자료수집 좀 해줘”
선배의 오더가 떨어지면 막내 작가는 그때부터 오리의 탄생부터 탄생의 비밀까지도 캐내는 자료수집에 들어간다. 오리란 어떤 동물인지, 오리가 어디서 자라는지, 오리에 관한 속담이나 재미있는 이야기는 없는지, 오리고기는 어떤 효능이 있는지, 오리고기로 만들 수 있는 요리의 종류는 무엇인지, 오리요리를 촬영할만한 식당이나 새로운 메뉴를 가진 곳은 없는지 내가 찾을 수 있는 곳은 모든 걸 동원해서 찾은 다음, 하나씩 관련 단어를 적어 라벨링을 한다.
보통 그렇게 자료수집을 하면 100페이지 이상의 자료들이 모이고 그걸 선배 작가에게 넘긴다. 아무 말 없으면 합격이고, 무언가 찾는 자료가 빠져있으면 날벼락이 떨어진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 통하지 않는 유일한 곳이다.
그렇게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면 막내 작가는 살짝 작가 티가 나는 ‘방송국 사람’이 된다. 그러면 프로그램 여러 군데 중에 한두 군데 담당 PD가 프로그램 제안을 한다. 물론 메인 작가가 아닌 보조 작가로 드디어 프로그램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데일리 프로그램의 보조 작가가 되면 보통 7~10분 내외의 꼭지를 하나 맡는다. 10분짜리 하나 가지고 죽을 것 같은 고뇌에 고뇌를 거듭한다. PD한테 아이템을 말하면 바로 까인다.
“야, 넌 생각이 있니? 없니?”
생각이 없는 건 아니고 우린 생각이 다른 게 아닐까요? 하고 말하고 싶지만 더 욕먹지 않기 위해 말도 참고, 눈물도 참고 또 참는다. 도대체가 막내 작가는 모르는 것들을 다른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신기할 정도로. 방송국에 있는 사람들은 역시 대단한 사람들이구나. 그런 대단한 사람들 속에 있는 나도 이제 대단해 질 거야 하고 생각하면서 역시나 고뇌의 밤을 새운다.
내가 막내 작가일 때는 이랬다. 그런데 생각보다 나는 쉬이 대단해지지 못했다. 날이 가면 갈수록 내 속에 많이 것이 부족하다는 걸 깨달았다. 아, 공부가 덜 됐구나. 사회공부도, 경제공부도, 모든 것이 부족하구나. 그다음부터 글을 쓰지 않는 시간에는 뉴스를 보고 신문을 보기 시작했다. 대학교를 4년이나 다니면서 신문 하나 뉴스 하나 제대로 관심이 없었던 나. 어떻게 이렇게까지 무식할 수 있을까. 사회에 관심이라고는 하나도 없을 수가 있지? 생각했다. 이 생각은 조금이라도 사회에 관심이 소홀해진 틈이면 늘 반복되고 있다.
작가가 되고서야 알게 된 수많은 것들 중에 ‘아는 만큼 보인다’는 속담은 꼭 맞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모르면 보이는 게 없고, 내가 알게 되면 점점 꼬리를 물고 새로운 사실들이 나를 찾아온다. 한 아이템을 잡고 글을 쓰기 위해서는 수많은 자료수집이 필요하고 그것들을 공부하면서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내야 한다. 자료가 풍부할수록, 그것들에 대해 더 많이 알수록 작가들은 더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부족한 사람이었고, 너무나 부족한 작가였고, 너무나 모르는 막내였다.
나의 첫 방송은 PD님의 엄청난 화와 욕을 불러일으키며 마무리됐다.
“넌 진짜…. 자막을 3차원적으로 뽑으라고!!”
사실 아직도 이 말은 조금 이해하기 힘들지만,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화가 난 목소리에 얼마나 울었는지 지금도 기억난다. 3차원적인 자막을 뽑고 남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색다른 아이템을 찾아내려고 밤새워 연구했던 적이 있다. 그때 나는 막내 작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