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쟁이로 살면 재밌다
여전히 막내 작가로 아침 생방송 프로그램을 할 때였다.
“봄 특집으로 꽃 좀 찍어와”
팀장님의 명령으로 금요일 여행 꼭지를 맡고 나는 전라도 여행 특집을 찍으러 떠나게 되었다. 사실 일거리가 가득 생긴 건데 난 왜 이리도 신이 났던지. 그리고 특집 주문을 하신 팀장님을 필두로 카메라 감독, 오디오맨, 그리고 리포터와 전라도 여행을 도와줄 여행 작가님까지 합류해 우리는 전라도로 여행을, 아니 촬영을 떠났다. 아무래도 생각해보면 당시 팀장님이 여행을 가고 싶었던 것 같다. 봄을 탔던 건 아닐까?
그때가 작가가 되고 울산을 벗어나는 것은 경주 촬영 이후로 처음이었다. 내가 있던 곳이 지역 민영방송이다 보니 다른 지역을 갈 일은 극히 드물었다. 그런데 잘 가보지도 못했던 전라도 여행이라니. 완전 신나서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집에 가서 짐을 쌌다.
특히나 내가 더욱 즐거웠던 건 바로 구성안도 없는 무대포 여행 촬영이었다는 것이다. 보통 촬영을 가면 어떤 구성으로 어떤 것을 촬영해야 하는지 일일이 촬영 구성안을 써야 하는데 이것이 참 만만치 않은 작업이다. 우선 아이템을 정하면 충분한 자료수집 후, 거기서 어떤 것이 필요한지 시험에 나올 문제 제출하듯이 핵심을 짚는 예리한 눈으로 구성안을 작성한다. 어디에 가서 어떤 그림을 찍고, 어디서 누가 어떤 멘트를 하고, 어디서는 누구와 인터뷰를 하는 등의 구성안은 모든 방송의 시작이다. 그런데 이런 구성안을 적지도 않고, 자료수집도 할 시간 없이, 아니 그냥 필요 없이 전라도로 달렸다.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은 바로 여수였다. 방송을 하기 위한 촬영을 하기 위해서는 1박 2일 , 3박4일씩 여유롭게 돌아보고 있을 수 있는 여유는 없지만, 포인트를 콕콕 찍어서 돌아봐야 하는 곳은 다 돌아보는 촬영을 한다. 여수의 경우, 지금은 ‘여수밤바다~’로 유명해졌지만, 당시에는 그 노래가 나오기 전이었고 당시 여수를 대표하는 것은 게장집이었다. 나는 여행이라고는 하와이 어학연수를 빼놓고는 (그것도 여행은 아니지만) 아르바이트하느라, 기회가 없어서 가본 적이 없었던 터였다. 그 흔한 가족여행조차도 우리는 내가 중학생 때인가 해운대로 한 번 다녀온 것밖에 기억에 뚜렷이 남는 것이 없으니 어딜 가든 신나는 기분은 더 말 할 것이 없었다.
당시 갔던 곳이 지금 여수의 3대 게장집인 ‘황소식당’이었다. 지금 여수는 엄청난 규모의 게장집들이 들어서 어디가 어딘지 모를 정도가 되었지만, 그때는 여행 작가님의 강력 추천으로 바로 황소식당의 낙찰, 5천 원에 한상 부러지게 나오는 전라도 맛의 진수를 확인했다. 지금은 가격도, 규모도 달라졌지만, 그때 황소식당은 약간은 허름했지만 한 상 가득 나오는 음식이 5천원 이라는 것도 믿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아직 게장 맛을 제대로 몰랐던 내게 양념게장과 간장게장에 눈을 뜨게 해준 그야말로 ‘심봉사 눈 뜬 밥상’이었다. 그리고 돌산공원과 돌산 등대, 오동도 등을 찍고 다음 목적지로 넘어갔다.
그 다음으로 간 곳은 살아 숨쉬는 생태 도시 순천, 호삼지역을 대표하는 15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선암사로 향했다. 매표소부터 선암사까지는 걸어서 15분 정도. 선암사 계곡의 물 흐르는 소리만 흐르고 주변은 적막하고 고요한 분위기가 흘렀다. 사찰에 들어서기 직전, 조선 시대에 지어진 무지개다리, 승선교를 만날 수 있다. 대한민국 보물 제400호로 지정된 승선교 아래에서 바라보는 선암사도 무척 아름다웠다. 선암사에는 20여 채의 건물이 있는데, 석가여래의 일대기를 8장의 그림으로 표현한 팔상도를 모신 팔상전을 비롯해 볼거리가 다양하다. 선암사는 영화 <아제아제 바라아제>, 드라마 <용의 눈물>에 등장하기도 했다고 한다. 선암사에 핀 홍매화도 기억이 아련히 난다. 그 옆에서 머리에 꽃 꽂은 채 사진 찍었던 기억도.
순천 하면 빠질 수 없는 곳이 순천만습지다. 고흥반도와 여수반도 사이에 바다가 파고들면서 만들어진 순천만. 이런 연안습지는 육상과 해양이 만나는 중간 지대로, 생태계의 보고라 할 수 있다. 겨울이면 희귀한 철새가 날아들어 갈대군락을 서식지로 삼아 겨울을 보낸다. 해가 지기 전의 순천만과 해질녘의 순천만을 찍기 위해 반나절은 보낸 것 같다.
순천여행의 마지막은 조선시대 읍성 중에 본래의 모습이 가장 잘 보존된 곳인 낙안읍성 민속마을이었다. 성곽이나 관아 건물은 물론이고 가옥 312동이 그대로 남아있는 곳. 특히 이곳 초가집에는 실제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굽이굽이 난 길을 따라 산책하듯 걷다 보면 현대에는 찾아볼 수 없는 드라마 같은 광경들이 펼쳐진다. 이곳에서 드라마 대장금도 찍어서 세트장도 있다.
순천을 이어 여행한 곳은 섬진강 풍경과 함께 전국의 아름다운 매화 명소로 꼽히는 광양이었다. 기억들이 아련하긴 하지만 광양에서는 섬진강과 시인 윤동주의 흔적이 남아있는 생가, 윤동주 공원, 광양불고기를 너무 맛있게 먹었던 것 같다. 아,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건 여행기가 아니라 촬영기다.
여러 곳을 들리고 더는 기차가 다니지 않는 철도에서 자전거도 타고, 그때 주가가 한창이던 한유진 리포터랑 신나서 사진을 찍으며 추억을 남겼다. 구성안도 없는 무대포 촬영이라 사실 좋기도 막막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훌륭한 조력자인 김강수 여행작가님과 호남여행을 지시하고 담당했던 당시 팀장님의 엄청난 기획력으로 우리는 일주일 치 여행 꼭지를 만들어냈다. 나는 작가는 촬영에 꼭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구성한 촬영 구성안대로 이루어지는지 변동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는지, 현장 분위기가 모든 것을 알아야만 제대로 된 글이 나오지 않을까?
그 후에도 ‘울릉도 특집’으로 1박 2일을 계획하고 들어간 울릉도에서 변화무쌍한 날씨로 인해 3박 4일을 갇혀 있었던 기억도 난다. 1박 2일, 토요일, 일요일을 이용해 다녀오는 여행 꼭지였는데 바다에 바람이 세게 불고 파도가 높아서 배가 움직일 수 없다고 한 것이다. 다들 옷도, 돈도 딱 1박 2일 어치만 들고 왔던 상황에 울릉도는 ‘절박함은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1박 2일 짜리 구성안이 3박 4일로 바뀌면서 울릉도를 돌아다니면서 눈에 보이는 대로 바로 섭외하고 촬영하는 진기명기도 선보였다. 첫날, 둘째 날은 밥을 먹었는데 다음날부터는 제작비도 거덜 나고 불쌍하게 라면을 먹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 와중에 촬영용으로 먹었던 울릉도의 따개비밥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정확하게 맛이 기억이 나진 않지만, 배가 고파서였을까? 꿀맛이었다. 다시 먹어보고 싶은 맛이었던 것 같다.
이렇게 방송을 하면 돈 없이도 여행을 다닐 수 있다. 물론 적극적으로 일하는 작가에게 돌아오는 특권이다. 다큐멘터리를 할 때는 해외여행을 가기도 한다. 그 재미로 힘들어도 방송을 하고 긴 호흡에 지쳐도 다큐멘터리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아이템을 찾으면 작가는 제일 먼저 맛을 보기도 하며, 신대륙을 찾는 콜럼버스가 되기도 한다. 그런 새로움과 재미가 그 어떤 일을 하는 것보다 신난다. 예전에도, 지금도 마찬가지다.
내가 어떤 기획력을 가지고 어떤 아이템을 만드는가에 따라 내 값어치도 달라지고 내 경험치도 달라진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