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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준 Feb 26. 2019

축하합니다 합격하셨습니다.

근데 너는 누구신가요?

인성이든 지능이든 간 크기든 뭐든 남들보다 한참 모자란 관심종자 대표가 있었더랬다. 함께해서 더러웠고 다신 보지 말자며 쿨하게 안녕하고 처음으로 백수의 시간을 가져볼까 했다. 실업급여받으면 월급 받던 때 보다야 가난하겠지만 그래도 좀 놀아보자면서 희망찬 백수 라이프 청사진을 그려보기로 했다. 그렇게 집에서 1주일인가? 알차게 뒹굴대던 때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어떤 해맑은 여성분이 한껏 들뜬 목소리로


'축하합니다! 합격하셨습니다.'


이게 무슨 소린가. 정말 진심으로 순간 보이스피싱을 의심했다. 일단 나는 면접 본 곳도 없이 한동안 평화롭게 지내고 있었고 스카웃 제안도 전부 고사하면서 3개월은 놀 요량으로 비행기 티켓이나 알아보던 중이었는데. 일단 정신을 좀 차려봐야겠다는 생각에 고쳐앉아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예? 뭐에 합격한 건가요?'


그 전화주신 분도 당황했나 보다. 말을 몇 번 더듬으며 뭐라뭐라 중얼거리다가 정신을 차렸는지 또박또박 어디 어디 회사에 합격했다는 안내멘트를 읊었다. 아! 회사 이름을 듣고 기억났다. 그러니까 그 바로 전 회사에 앉아있기 싫어서 밖에 나갈 빌미를 만들려고 여기저기 이력서를 찔러본 적이 있었다. 바로 취직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서 이력서도 대충 썼고 그러다 보니 불러주는 곳은 잡플래닛 평점 1점 미만의 인간 탈곡기 수준 같은 회사뿐이었다.


이런 느낌의 회사들


물론 진짜 이력서는 따로 준비하고 있었고 면접 경험이 전혀 없던 나는 일단 가고 싶은 회사 지원하기 전에 경험이나 쌓자 하는 핑계 정도로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회사구경 내지 담소 정도 나누자는 생각으로 돌아다녔었다. 그러니 면접 따위 잘 봤을 리 없다. 대체 나의 뭘 보고 나를 뽑았다는 거지?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수화기 너머에서 정신 차린 그녀가 무슨 속사포랩 하듯이 뭔가를 뱉어냈다.


'합격하셨고요 연봉은 전에 협상하신 그대로고 다음 주 월요일부터 출근하시면 됩니다. 이견 있으세요?'


이 사람아 그렇게 보험약관 독소조항 읊듯이 말하면 없던 이견도 생기겠다. 일단 왜 합격했는지도 모르겠고 연봉은 협상도 한 적 없고 오늘 금요일인 데다가 생각해보니 면접 본 지 40일이 넘었는데? 진짜로 내 개인정보가 뎁스있게 팔려서 회사 이름 대고 보이스피싱이라도 시도한 건 아닌가 곰곰이 생각해보고 있는데 이견이 없냐고 계속 채근하듯이 물어왔다. 나는 일단 그녀에게 일단 제일 궁금한 것 하나만 물어보기로 했다.


'제가 협상했다는 연봉이 얼마인가요?'

'여, 연봉이요, 연봉... 네?'


둘 사이에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협상자 없는 연봉 협상.


'연봉 협상 안 하셨어요? 면접을 언제 보셨는데.'

'아니 내가 합격한 줄 어떻게 알고 연봉을 협상해요. 이게 면접보고 첫 전화인데요.'

'아니 잠시만요 그, 그, 그, 경력. 경력이 얼마나 되시죠?'

'기억이 안 나는데 제 이력서 거기 없나요?'


여자가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그런 느낌. 자기는 빨리빨리 말을 하고 싶은데 뭔가 사고해야 할 일이 생기니까 지체되어 버벅거리는 느낌. 나는 일단 침착하게 일어나서 담배를 한대 물고 잡플래닛에 회사 이름을 검색해봤다. 그런데 잡플래닛은 둘째치고 어느 포털에 검색해도 이 회사 이름이 나오질 않았다. 이게 뭔,


'아 경력 확인되셔서 연봉 얼마 얼마입니다. 이견 있으세요?'

'예?'

'연봉 얼마 얼마입니다. 이견 있으세요?'


그놈의 이견, 이 회사는 이견이란 단어를 더럽게 좋아하나 보다. 이렇게 숨 넘어가듯이 외치는 걸 보면.


'아니 이견은 없는데 그 정도면 괜찮은 것 같은데... 근데 제가 뭐로 지원했나요?'


또 그 여자는 뭔가 한참 뒤적이기 시작했고, 나는 기다리다 지쳐서 내가 찾아보겠다고 했다. 그 다음은 뭐 의미없이 누가 먼저 전화를 끊을 것인가 하는 눈치싸움처럼  예, 예, 예, 예 하면서 의미 없는 공명 하다가 끊었다. 졸지에 다시 회사원이 되었다. 그게 이상한 나라로 떠나는 급행열차일 줄은 꿈에도 몰랐지.


우리는 달려간다 이상한 나라로.


이 회사를 오겠다고 수락한 건 이견이 없냐며 숨넘어가듯이 채근하던 그녀 때문에 판단에 혼란도 조금 있었지만, 면접 때 꽤 좋은 인상이 남아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팔자에도 없던 창업의 굴레를 지나오니 이상하게도 사업기획이나 마케팅 같은 일자리만 굴러들어 와서 지쳐있던 차였다.


이 회사는 블록체인을 마케팅하는 회사였고 나는 카피라이팅과 영상 기획으로 지원했다. 대체 그놈의 블록체인은 뭔데 이리 시장에서 뜨거운지, 뭐가 있고 광고는 어떻게 하는지 꽤 관심 가지고 공부하던 적도 있었고 하던 차에 우연히 내 눈에 들어왔었다. 그런데 한 달이 넘도록 연락이 없었으니 기억에서 지워버렸었지.


아무튼 그렇게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이 되었다. 나름 첫 출근이라고 넥타이도 하고 갔다. 회의실로 안내를 받아 혼자 멀뚱멀뚱 30분 정도 앉아있다 보니 남자 한 명이 들어와서 같이 앉았다. 직감으로 저 사람도 오늘 처음 출근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동기인가? 말이라도 걸어봐야 하나? 하는 생각 몇 번 하다 보니 이미 말을 걸 타이밍을 놓쳤다. 둘 다 눈앞에 있는 보드마카 만 멀뚱멀뚱 바라보며 30분 정도 더 앉아있었던 것 같다.


보드마카! 아주 훌륭한 상상놀이 도구지!


두 명이 더 들어왔다. 한 명이 나에게 뭔가 종이 한 장을 건네주고 사인하란다.


'읽어보시고 이견 없으시면 사인하세요.'


이견이 있냐는 말에 이견이 있다고 하고 싶어 질 지경이었다. 그놈의 이견. 이 사람이 나한테 전화한 사람인가? 그런데 옆 사람은 무슨 묵직한 파일을 건네받았다. 취업규칙이나 사규에 대한 파일이란다. 왜 나한테는 안 주지? 이건 무슨 신박한 차별 방식이지. 하면서 방금 전 건네받은 취업 계약서를 쭉 훑어보았다.


'어? 그런데 왜 처음 3개월은 수습기간이고 월급이 90%밖에 안 나오는 거예요?'

'그건 경력이 짧으셔서 그래요.'

'아니 유선상으로 통화했던 거랑은 다른데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나를 보던  그녀는 매우 크게 당황해하더니 잠시만 기다리라며 어디론가 뛰어나갔다. 그 사이 취업규칙과 두툼한 서류뭉치를 든 남자는 사인을 슥슥 하고선 안내를 받으며 밖으로 나갔다.


또다시 30분을 앉아있었다. 이럴 거면 그냥 점심 먹고 오라고 하지. 더 이상 빈 테이블 위에서 적당한 놀이거리도 찾기 힘들어질 때쯤 그녀가 들어왔다.


'아 그게 방금 이사님께 여쭤보고 왔는데요. 경력 인정이 안 되셔서.'


놀랍다.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이 모든 사실을 첫 출근하는 날 알려준다고? 아니 그것보다 이 모든 사실이 내부 공유가 안 되어있었다고? 하도 기가 막혀서 이제 이견이 있냐는 그녀 말도 멍멍하게 들렸다. 이견이 있으면 이견 하나당 30분을 더 기다릴 것 같았다.


'아 알겠습니다. 그냥 일할게요.'


더 이상 고통받고 싶지가 않았다. 입사를 간절히 바란 것도, 마음에 드는 회사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름 모르는 회사에 입사하는 것이 공식적으로 처음이었으니까. 이왕 일할 거 치명적인 위협 없으면 그냥 일하기로 하자. 하고 생각했다.


그러지 마! 그냥 그대로 이견 있다고 하고 나가!


하지만 회사 자체가 그냥 치명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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