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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준 Mar 04. 2019

수습평가가 있다고?

게다가 잘릴 수도 있다고?

이전 회사들이 대부분 거지 같았지만 단 하나 좋았던 것은 출근 시간이 자유로웠던 것이었다. 아침잠이 많은 나에게 스타트업의 자유로움은 최적의 근무 환경이었다. 매일 11시쯤 출근하는 나를 보며 친구들이 가끔 말하던 것들이 있었다.


- 넌 정말 일반 회사 가면 큰일 날 거야.

- 왜? 지각하면 잘리나?

- 아니 그 정도는 아닌데... 아 그걸 겪어 봐야 돼.


그리고 나는 이 회사에서 지각자의 설움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입사한 지 한 달도 안 되어서 세 번인가 지각한 나는 에이 5분 늦은 게 지각이야? 나정도 인재면 이 정도는 감지덕지지 하고 있다가 이사에게 불려 갔다. 그리고 공개된 장소에서 아주 대차게 혼쭐이 났다.


- 너는 입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놈이 무슨 지각을 이렇게 많이 했어! 이래 가지고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겠나! 수습기간 중에 말이야!


응?


수습기간? 나 경력직으로 들어왔는데? 게다가 평가도 있어? 저 짧은 문장 속에는 이해 안 되는 단어 투성이었다. 아무 안내도 못 받았는데 이게 무슨 날벼락같은 소리야. 사무실 한가운데서 큰 소리로 혼나던 내용을 들은 동기들도 혼란한 건 마찬가지였다. 이게 무슨 소리야.


할 일이 없어서 친구 만들기에 열중해있던 B양은 우리 중에 정보가 제일 많았다. 이것저것 대화를 나눠본 끝에 결론 내려진 사실은, 우리는 3개월 동안 수습기간이며 이 기간 동안 평가가 좋지 않으면 잘릴 수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 나는 아무 할 일도 없이 앉아있고 팀장도 누군지 모르는데, 아니 누군지 안 가르쳐주는데 누가 평가해?


보릿자루 1이었던 나는 당연히 평가자도 모르고 평가당할 일도 없었고 그러니 당황하기 시작했고, 보릿자루2 B양은 평가자가 있었지만 평가당할 일이 없는 것은 똑같은 당황 거리였다. 그나마 A형님은 과도한 업무에 시달리고 있었으니 유일하게 평가받을 일이 있었지만, 아니 일단 뭘 가르쳐줘 가면서 업무 수행 능력을 보고 평가를 해야지. 


그렇게 어안이 벙벙해하고 있던 며칠 뒤, 우리보다 몇 달 앞서 취직한 사람들의 수습기간이 끝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입사한 인원의 과반이 넘게 평가의 벽을 넘지 못했다는 사실과 함께. 탈락한 인원은 내가 앉아있는 변두리 라인 전체도 포함이었다. 옆사람이 좀 수줍어서 그렇지 일은 굉장히 열심히 하던데... 말 좀 걸어서 이제 드디어 좀 친해지려나 싶었는데... 졸지에 나는 외딴곳에서 더 외롭게 앉아있게 되었다.


유배당한 기분이었다.


나는 더더욱 할 일이 없어졌다. 이제 자리에 앉으면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없어졌다. 게다가 회사에 야근 이슈라고 생기면 이사가 나서서 누구는 집에 가고 누구는 남아있을 수 없으니 전체가 다 남자! 하는 거지 같은 논리를 펼치는 바람에 뻘쭘하게 앉아있다가 슬금슬금 퇴근하고 그랬다. 정말 사람이 못할 짓이었다.


경영지원 팀에 제발 내 소속 좀 분명하게 해달라고 애원하던 중. 드디어 반가운 소식을 전했다. 팀이 정해질 것 같다고. 수습 평가로 떨어져 나간 인원 자리에 내가 배치될 것 같다고. 문제는 이거였다.


- 그런데 그동안 업무보고서 안 쓰셨어요?

- 그게 대체 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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