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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준 Mar 12. 2019

어느 마케터의 업무 - 희망 편

절망 앞엔 희망이 와야 역시 맛이 살지

일 이야기를 해보자. 뭐 일을 아예 안 한 건 아니었으니까. 

일단 희망 편으로.


내가 속한 팀은 광고기획 팀이었다. 내가 카피라이터 및 영상 기획으로 지원했다 하더라도 기본적으로는 계속 마케팅과 브랜딩을 겸했으니 못할 일은 아니었다. 그러고 처음 들어간 기획 회의는 참으로 놀라웠다. 이렇게 일을 해도 괜찮다고? 싶은.


- 무슨 행사를 할 건데 사람들 참여할만한 이벤트 아이디어 좀 내와봐.


기본적으로 한 시간 정도 회의를 했지만 결국 남는 건 저 디렉션 한 문장이 떨어진다. 디렉션을 준 이는 나가고 우리끼리 모여서 누군가 한 마디 한다.


- 그럼 각자 조사 좀 하고 아이디어 취합해볼까요?


회의 내내  쓸데없는 말을 듣는 내 머릿속 풍경


나는 즉흥적으로 아이디어가 샘솟는 타입보다는 혼자 진득이 생각해가면서 이것저것 찾아봐야 아이디어 하나를 내는 타입이다. 그리고 기획에서 가장 중요한 건 무엇보다도 이걸 보는 상대방을 설득할 수 있는 논리의 뒷받침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 내가 회의를 끝내고 며칠 정도 걸렸다는 아이디어들을 봤을 때 정말 놀라웠다.


모든 아이디어를 딱 세 단어로 말할 수 있다.

룰렛, 주사위, 단순 인스타 인증 추첨


그 어떤 행사와 그 어떤 프로젝트를 해도 저 세 가지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아니 반드시 들어맞았다. 세상에 얼마나 레퍼런스가 차고 넘치는데 이게 무슨 아이디어라고. 심지어 모든 행사에 저 세 아이디어가 똑같이 적용되었다. 아니 그것보다 이게 광고기획팀의 업무라고?


내 생각엔 게등위 심의라도 받아야 할까 싶다.


이건 아닌 거 같았다. 내가 알고 있는 광고도 아니며 기획도 아니다. 언젠가 기회를 봐야겠다 하고 벼르던 와중 문제가 터졌다. 이 아이디어를 결제해야 하는 클라이언트들의 분노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무슨 마케팅 기획을 만들어 오라 하면 죄다 저따위냐고. 이럴 거면 그냥 뽑기 통 하나를 만들어달라고. 필요할 때마다 뽑아서 쓰게.


클라이언트 중에는 계열사도 있었다. 아 계열사라고 하니 무슨 큰 그룹 같은 느낌이지만 이 얼마나 허황된 조직인지 눈치채는 건 나중 일이니까 나중에 까보자. 아무튼 계열사의 불만은 고스란히 우리 몫이었고 나는 이게 기회다 싶었다. 나는 그동안 유배지에서 모아 왔던 해외의 창의적인 프로모션 레퍼런스들을 가지고 이걸 왜 해야 하는지 온갖 논리를 동원해 기획서로 어필했다. 혼자서 대충 30장 정도 PPT를 만들었고 서너 장씩 취합된 아이디어들은 대충 기워넣어 이사에게 보고했다.


- 이건 뭐 생각 없이 여기저기 있는 거 갖다 붙인 거밖에 더 되나?

- 이걸 우리 입맛에 맞게 바꿔서 실행해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으로 넣었습니다.

- 네 생각엔 이게 될 것 같냐?

- 이미 성공사례들이고 그동안 한국에서는 없었던 아이템들이라 매력적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사는 현실 가능성과 단순 아이디어들만 취합해놓은 것에 대해서 혼내기 시작했다. 뭐 상관없었다. 룰렛, 주사위, 인스타 이벤트에서 벗어난 일만 할 수 있다면. 결국 이 아이디어들을 다듬어서 우리 이벤트 방식으로 맞추어 기획해보겠다고 말하고 회의를 끝냈다. 그러고 자리로 돌아가 5분인가 멍하게 앉아있었나? 이사가 갑자기 회의실로 불렀다.


가보니 다른 행사를 주관하는 다른 계열사의 매니저들이 앉아있었고, 아까까지만 해도 화내던 이사가 거만한 자세로 의자에 앉아 PPT를 주욱 넘기며 이야길 꺼냈다.


- 그동안 너무 단순한 이벤트만 했고, 그래서 우리 애들이 뭔가 열심히 준비했더라고. 그런데 너무 단순하고 다른 아이디어들 모아놓은 거에 지나지 않아서. 그래도 내 마음에 드는 거 딱 하나는 있더라.


당연하지 나머지는 그럴듯한 페이크였으니까.


내가 야심 차게 준비한 한 장의 장표 앞에서 마우스 휠 스크롤이 멈췄다. 사실 다른 건 다 필요 없었다. 딱 저 아이디어 하나만 보고 있었고 그게 먹히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 이거 어때?


매니저들은 대박이라며 각자 어떻게 하면 좋을지 이 사람 저 사람 가리지 않고 살을 붙여대기 시작했다. 아니 왜 지들 아이디어인 것처럼 저렇게 하이에나처럼 달려드는 걸까. 하고 멀뚱멀뚱 앉아있는데 이사가 나에게 말했다.


- 이거 구체화시켜서 제안서로 만들어와 봐.


여기까지 하면 이제 희망같아 보일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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