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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준 Mar 13. 2019

어느 마케터의 업무 - 절망 편

본격적인 고난의 시작

여차저차 해서 바쁘게 기획서를 만들었다.


주 아이템은 오프라인 참여형 이벤트였고 SNS에 결과를 반영해서 보여주는 일종의 온오프 연계 이벤트였다. 설치물 제작 견적도 받아야 하고 일정 확인도 해야 하고 해당 구청에 허가 여부도 알아봐야 하고 인근에 도움받을 수 있는 곳도 협조 요청해야 하고 인력 구성에 동선 체크에 일기 예보도 봐야 하고 시간도 적절히 배치해야 하고 Best, Normal, Worst case 정도 나누어서 진행 사항에 따라 대비책도 마련해야 하고. 아이디어를 내는 건 쉽지만 이걸 실행에 옮기는 건 정말 손이 많이 가는 일이다.


여기서 문제가 슬슬 생기지 않으면 멋있게 이벤트 열어서 딱 끝내고 내 포트폴리오도 한 장 멋지게 들어가고 이 글도 쓸 일이 없었겠지.


뒤에서 보고 있던 이들이 슬슬 개입하기 시작했다. 주로 팀장들이었다.


- 거기 홍보부스 하나 놓으면 그림 이쁘겠다. 그치?

- 이왕 하는 거 행사 말고 그룹사 홍보도 해야지. 안 할 거야?

- 단순 참여 확보 말고 좀 더 여러 가지 목적을 넣어봐. 뭐 수익 창출이라든가.

- 인쇄물에 로고가 너무 적잖아. 있어 보이게 더 넣어.


그리고 누군가 와서 슬쩍 막타를 친다.


- 아직도 안 됐어? 빨리 해야지 시간 없는데.


죽인다.


이 외에도 참 많은 방해가 있었다.


- 예산이 이게 뭐야. 이거 만드는 데에 이렇게 든다고? 너무 비싸! 줄여!

- 결과물이 이게 뭐야! 처음엔 이뻤잖아. 더 퀄리티 높여봐!


예산과 퀄리티 사이에서 나는 무슨 용산역에서 플레이스테이션 CD 파는 아저씨도 아니고 이거 가지고 한나절을 흥정했다. 결과는 참패. 툭 까놓고 말해서 돈 3십만 원 정도로 뭐 홍보부스도 만들고 간이 무대도 만들고 아크릴 금형 떠서 투표소도 만들고 하는 수준을 원했다. 도둑놈도 아니고. 아 그냥 내 돈으로 할게요 하는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려는 걸 힘겹게 참았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 정도 수준의 일을 해냈다는 것이다! 물론 어디 출품해서 상이라도 노려볼만한 퀄리티는 아니고 어디 초등학교 동아리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방과 후 활동 결과물로 내면 부모님들이 기특해할 것 같은 느낌의 결과물이긴 했지만. 일단 이벤트를 제시한 예산 안에서 실행 가능하게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당시엔 기적 같은 일이었다. 뭐 주문하는 게 그런 거니까. 극강의 가성비.


분명 뒷다리는 잘 그렸었던 것 같은데


이 정도면 토 안 달겠지. 진짜 혼을 갈아 넣었다 싶은 기획서... 라기보다는 이제 나도 이게 뭔지 모르겠는 무언가의 파일 덩어리를 이사에게 보여주었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는데 그래도 내 자식 같은 아이디어니 세상에 빛은 보게 해 주자는 심정으로, 내가 자재 사다가 제작하겠다고 자처하면서 제작 인건비까지 깎아놓은 기획안이었다.


- 야 여기에 인스타 패널도 하나 넣자. 그거 넣어도 되잖아?


아이참 마무리도 완벽하지.


뭐 무튼 그렇게 해서 클라이언트에게 보고하겠다며 자리로 가보라 했고 나는 자리로 돌아와 세부 실행 안을 짜기 시작했다. 그런데 웬걸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1주가 지나도 답이 없었다. 진행이 되는 건지 마는 건지. 물어보면 좀 더 기다려보라고만 하고 하도 답답해서 계열사 팀장한테도 슬쩍 찾아가서 물어보고 오다가다 안면 익힌 다른 직원들한테도 슬쩍 물어보기도 했다.


어찌 내가 보낸 아이디어가 돌아오지 않는 것이냐!


그러길 대충 2주일쯤, 아주 재미있는 사실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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