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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준 Mar 26. 2019

사공이 없으면
배는 산에서 출발한다.

아니 배도 없어 그냥 산이 산으로 간다.

내가 보낸 아이디어는 어디선가 돌긴 돌았다. 그런데 문제는 이 아이디어에 대해 의사를 결정할 수 있는... 아니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는 거지. 이해를 빠르게 하기 위해 간단하게 표현해보면, A계열사의 대표는 아주 좋아하는데 B계열사의 이사가 안 좋은 것 같다고 하고, C계열사의 대표가 결재를 해주었으나 A계열사의 이사가 반대해서 결재는 났으나 실행은 되지 않는 뭐 한 마디로 아주 거지 같고 복잡한 그런 상황이었다.


놀라운 사실은, 클라이언트는 A 계열사고 B, C, D 계열사는 상관이 없는 데다가, 결재권자 같지도 않은 사람이 어째서 결재를 했는지, 그건 누가 상신했는지도 모르겠고 대체 다른 계열사의 누군가가 이미 결재가 난 건을 실행 못하게 막을 수 있는지가 놀라웠다. 이제 내가 낸 아이디어는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기분이었다.


들으면서 나도 믿기지 않았다.


무슨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라도 가지. 이건 배가 분명 떠났는데 사공은 없고 산에서 출발해서 산을 향해 가는 기분이라고 해야 되나? 뭔가 앉아있으니 여기저기서 내 아이디어에 대한 평가가 들리긴 했는데 어디부터 어디까지 잘못되었는지 아니면 뭐가 잘 되고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최종적으로 한다, 안 한다의 명확한 의사결정도 없이 내 아이디어에 대한 모든 것은 증발해버렸고, 주행사에 필요한 어플이 런칭이 시작되는 날까지 나는 아이 잃은 부모처럼 이 사람 저 사람 붙잡고 실행 여부를 묻다가 결국 마음에서 놓아주어야 했다. 웃기는 건 그놈의 어플도 사내에 개발자가 15명이나 있는데 그거 하나 몇 달 동안 못 만들어서 외주를 주는 바람에 무지막지하게 늦어졌지만 (애초에 주 수입원인 앱을 외주 맡기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그 기간 동안에도 뭐 내 아이디어는...


긍정적으로 생각해보자. 내 아이디어는 먼 여행을 떠난 거야.


이게 무슨 거지 같은 조직이야. 한탄하고 있을 때쯤 누군가 나를 스윽 데리고 나가서 은밀하게 나만 알고 있으라는 듯이 말해주었다. 위에서 어느 분이 '내가 비슷한 거 해봐서 아는데 효과가 있겠어? 나라면 안 하겠는데?'라고 하셨다고. 당연히 타깃이랑 머니까 영감쟁이인 너는 안 하겠지.... 아니 그것보다 '위'가 대체 누군데... 아니 뭣보다도 비슷한 걸 해봤다고? 진짜로? 게자가 그걸 왜 몇 주가 지나서야 말해주는 건데?


그렇게 분노와 실망과 패배감에 절어있는 와중에 또 굵직한 업무가 떨어졌다. 해외에 무슨 행사에 참여한다는데 홍보부스를 운영한다고 한다. 그걸 나보고 맡으라고 했다. 정말 일말의 기대도 없었지만 일단 몇 달간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었으니 이거라도 해야 한다는 심정으로 쿠크다스 봉지 안에 부서진 가루마냥 바스러진 멘탈을 어떻게든 긁어모았다.


RIP 멘탈.


국내에 홍보부스 하나 운영하는 것도 힘든 일인데 외국이다. 생전 가본 적도 없는 나라에 홍보부스를 설치하고 운영해야 한다고 한다. 그냥 여기까지만 해도 대충 고생 견적이 얼추 나오는데 여기서 끝이 안 난다. 이전에 내가 냈던 아이디어 까이고 사라질 때는 슬쩍 숨어있던 팀장 빌런들이 슬그머니 나와서 또 의견을 쏟아낸다.


- 우리 회사 아이템 시연 안 할 거야? 키오스크 보내야지.

- 이벤트 안 할 거야? 이벤트.

- 리플렛을 누가 읽는다 그래? 좀 획기적인 아이디어 좀 내봐

- 뭐 하나라도 받아가는 게 있어야 부스에 사람들이 오지. 선물 만들어봐.

- 그 나라는 인스타그램 안 하나?


무슨 지네 집 마당에 수제 레모네이드 파는 정도로 생각했나 보다. 홍보부스 현수막 인쇄 업체를 현지에서 할지 여기서 제작해서 배송할지도 머리 터지겠는데 뭘 자꾸 추가하래. 게다가 기한도 꽉 차있었다. 불가능한 일정은 아닌데 뭔가 이전에 업무 프로세스들이 마음에 걸렸다.


가오가 뇌를 지배했나 보다. 학습이 안 되는 거 보면.


그중에는 그 나라 통이라는 계열사 대표가 그 나라에서 영향력 있는 회사 관계자를 데려왔다며 나에게 붙여주었다. 굉장히 어려 보이던 그 친구는 반갑다며 손을 내밀었고 나는 뭔가 저 거지 같은 안갯속에서 나에게 내려온 동아줄 잡는 느낌으로 손을 잡았다. 그게 썩은 동아줄인 줄은 꿈에도 몰랐지.


정신없었다. 통관부터 시작해서 배송 일정, 제작 일정, 심지어 우리 회사엔 제대로 된 디자이너도 없어서 내가 디자인까지 전부 맡아서 해야 했다. 키오스크는 전자제품이어서 무선기기 등 인증을 위한 허가가 따로 필요했고, 현지 인쇄업체 수준이 좋지 않아서 국내에서 전부 제작하고 보내기로 했다. 배송비가 너무 많이 들어서 이것도 적당선에서 협의해야 했고 바쁘고 바쁘게 돌아갔다.


항상 일을 어느 정도 하고 나면 고난이 찾아오는가 보다. 뭘 하려고만 하면 관련 계열사와 부서에 사람이 없었다. 시간은 하루하루 촉박하게 다가오는데 담당자가 없으니 미칠 노릇이었다. 선물로 준비한 상품들은 세관에서 걸린다고 한다. 상업용으로 판매하지 않는다는 허가도 따로 받아야 하고 뭐 이래저래 뛰어다니면서 현장 체크하고 돌아온 담당자들과 회의하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그때 그 어린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 디자인 시안 좀 주세요.

- 아 그거 바로 제작해서 보내드리겠습니다. 2일은 걸릴 것 같은데요.

- 아니 빨리 달라고요. 지금 달라고 하지 않습니까? 당장 안 주면 행사고 뭐고 다 안 돼요. 지금! 지금! 지금!


이야.. 이거 영화에서나 보던 건데...


저게 과장으로 쓴 말이 아니다. 진짜 저런 식으로 말했다. 모든 커뮤니케이션이 저런식이었다. 아니 이 미친 인간아 홍보부스 목업이나 디자인 제작 시안을 어떻게 전화받자마자 바로 주냐. 나도 결재라인 있어서 허락받아야 돼.... 중에 알고 보니 우리 회사는 그 영향력 있다는 회사와 파트너십을 맺었고 저 담당자라는 놈은 그 회사 사장 아들이었다.


- 이거 행사 엎어지면 다 당신 책임입니다. 알아요?


와 가만 보니 이 미친놈이 갑질을 제대로 할 줄 안다. 우리 회사 팀장급은 붙을 엄두도 못 냈고 그나마 이사가 붙어봤는데 그래도 아주 지랄이 풍년이었다. 다른 업무 때문에 바빠 죽겠는데 이 미친 인간 전화를, 그것도 국제전화로 내가 퇴근하고 나서 까지 시달려야 한다는 게 진짜 너무너무 짜증 나 죽을 것 같았다.



더 웃긴 건 홍보부스 결재가 안 떨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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