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울 만큼 그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자리를 안내해준다며 회의실을 나와 사무실 안쪽으로 걸어갔다. 꽤 큰 사무실이었는데 다른 회사랑 같이 쓰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걸어간 곳은 다른 회사와 파티션 하나를 세우고 마주한 가장 변두리. 조만간 자리 이동이 있을 거여서 임시로 배정한 자리라고 했다. 불편하더라도 당분간 앉아있으라며 나를 데려온 사람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앉아만 있으면 되나? 내가 속한 팀이나 조직 소개는 없나? 면담이라든가 뭐 인사라도 돌려야 하나? 쭈뼛쭈뼛 앉아서 주변을 둘러보며 나름 분위기를 파악하려고 했다. 내 맞은편에는 다른 회사 임원이 앉아있는 것 같았고 뒤쪽으로는 내가 합격한 회사 사람들인 것 같았다. 뭔가 굉장히 분주해 보였고 알 수 없는 일들을 하고 있었다.
오른쪽에는 굉장히 어려 보이는 사람이 뭔가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했더니 뭔가 수줍은 듯이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아 아 예...' 하고 다시 키보드로 시선을 향했다. 이 사람이 같은 팀인가? 아니 대체 뭐라도 좀 알려주면 안 되나!
가끔 팀장급인 것 같은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러 나가는 것 같으면 미어캣처럼 보고 있다가 쫄래쫄래 따라나갔다. 그리고 새로 입사했다며 잘 부탁한다고 인사하는데 정말 놀라울 정도로 무안하게 무시당했다. 그리고 뻘쭘하게 근처에 서성이다가 사무실로 들어갈 때 다시 쫄래쫄래 따라 들어오고는 했다. 자리에 돌아와서는 네이버 실시간 검색어나 보면서 시간 보내고... 이 것이 일과의 전부였다.
뭐 어도비랑 문서 프로그램 몇 개 설치하고 내 손에 맞게 이것저것 세팅하려고도 했는데 자리도 누군가 지나가면서 자리도 임시고 컴퓨터도 임시이니 건드리지 말라고 했다. 나중에 그 컴퓨터 들고 자리 옮겨야 했을 때는 진짜 그 컴퓨터로 머리를 찍어버리고 싶었다.
정말 이렇게 앉아만 있으면 월급을 준다는 말인가. 마침 아는 형님에게 연락이 왔다.
- 취직했다며? 용케 경력이 안 끊기네, 그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다?
- 형님 그런데 회사에서 아무것도 안 시키고 앉아만 있어요.
- 아 그거 원래 큰 회사는 다 그래. 나는 6개월을 앉아만 있었어.
큰 회사가 아니라 그냥 이상한 회사여서 그랬다는 걸 알게 되는 건 훗날의 이야기이다.
- 왜 이러는 거예요? 월급을 왜 주지?
- 돈 잘 버는 회사라 그런가? 블록체인 관련 회사라며.
- 네 블록체인 마케팅이 기본인데 무슨 대행사인지 모르겠어요. 제가 아는 대행사가 아닌데?
이곳은 검색광고와 바이럴 마케팅 대행사였고 그나마 대행사라고는 종합 광고 대행사와 브랜드 디자인 기획 관련된 경력이 전부였던 나의 모든 마케팅과 브랜딩 지식이 정면으로 부정당하는 것도 훗날의 이야기이다.
뭐 아무튼 그런 생활을 3주쯤 했는데 정말 거짓말같이 아무도 나에게 뭔가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내 팀이 어딘지도, 이 회사 사람들 이름이 뭔지도, 내 직무가 뭔지도, 이 회사가 하는 일이 뭔지도 모르는 채로 그렇게 앉아있었다. 가서 물어보면 일단 자기는 아니라는 말과 모른다는 말, 다른 사람에게 가서 물어보라는 말만 되돌아왔다. 아니 너한테 물어보래서 온 거라고...
와중에 날 면접 봤던 이사가 내 두로 슬그머니 오더니 몇 마디 말을 걸었다.
- 일이 많지? 한창 바쁠 때 입사해서.
- 일은 괜찮은 것 같은데... 저 그런데 제 팀이랑 팀장님이 누구신지 모르겠는데 좀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
- 아 그건 좀 기다려. 조만간 인사개편 끝나고 자리 옮기고 하면 정해줄게.
이사는 사무실 반대편 끝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 네 팀은 저어기 반대편에 있어. 너도 저기로 자리 옮기게 될 거야.
3주 동안 다섯 번은 가서 제가 여기팀이라고 하던데요? 하며 물어봤던 그곳이었다. 물론 그 아무도, 그 어느 누구도 시원하게 네! 우리 팀이에요! 하고 받아주는 이는 없었고 너 우리 팀 아니라던데? 다른데 가서 물어봐하는 말만 들었던 곳이기도 하고.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2주를 더 앉아있었다.
그냥 유령처럼 앉아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동기가 두 명 있었는데 한 명은 내가 지원했던 영상 기획 분야로 들어온 A형님, 한 명은 아직 생기지도 않은 부서에 혼자 뽑아놓은, 나와 같은 보릿자루 신세의 B양이었다. 자유롭게 말 붙일 수 있는 사람은 이 두 명으로 메신저로 슬쩍 불러내서 야외 쉼터에서 수다나 떨고 했다.
영상이라는 것이 종류가 참 많기도 하고, 업무분야를 나누고자 하면 정말 세세하게 나눌 수 있는 분야인데 이 A형님은 영상이라는 단어 하나만 보고 들어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게 그 형님의 커리어는 다큐멘터리 방송 기획이었고 이 회사가 원한 건 정말 바로 행동이 나올 수 있게 재밌는 바이럴 영상이었으니까.
입사하고 나서야 안 사실이지만, 이 회사에서는 기획은커녕 편집을 이끌어줄 사람도 없었다. 기존에 유일하게 편집자 한 명을 두고 있었는데 이 양반이 어마어마한 마이웨이라서 일을 혼자 다 가져다 하고 있었고, 졸지에 A형님은 혼자 죽어나고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포맷과 성격의 영상을 다뤄야 했고 심지어 유일하게 다룰 수 있는 프로그램이 프리미어 하나여서 가편집만 가능했지 최종 편집도, CG도 자막 하나 자기가 넣을 줄 몰랐다.
나도 영상으로 지원했고 지난 스타트업들에서 굴러다니면서 나름 포토샵, 일러, 에펙 정도는 눈감고도 하고 강력하게 제작일 하고 싶다고 어필하는 포트폴리오를 제출했는데 왜 나를 안 부려먹는지 이해가 안 갔다. 게다가 영상디자인이 부전공인데.
- 나도 영상으로 지원했는데 왜 형님만 고통받게 둘까?
- 몰라 나 엄청 바빠.
매일 아침마다 A형님은 이 회의 저 회의 불려 다니며 서식도 없이 무작정 뭔 영상 기획 보고서를 써오라고 강요받았다. 그러고 수시로 나를 불러내서 아이디어를 달라던가 하는 일상이 반복되었다. 나는 일을 뺏어와서 좀 나대볼까 하고 잠깐 고민했지만 결국 월급 루팡의 결심을 굳히고 도망다니기로 했다.
B양은 나보다 사정이 더 딱했다. 나와는 달리 본부도 팀도 명확했지만 본인이 유일한 본부원이자 팀원이었다. 아무도 그녀에게 일을 주지 않았고 아무도 그녀의 존재를 신경 써주지 않았다. 나는 소속을 알려주지 않으니 이 사람 저 사람 붙잡고 내 팀 좀 알려달라고 사정할 일이라도 있지, B양은 정말로 물어볼 일조차 없었다.
슬쩍 만나서 뭐 하냐고 물어보면 토익 공부 중이라고 했다. 뭐 어차피 아무도 신경 안 쓰니 무선 이어폰 끼고 회사 프린터로 교재 출력해서 공부나 한다는 것이다. 정말 놀라운 회사구나 하며 매일 감탄을 금치 못하고 영혼 없이 출퇴근을 반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와 내 동기들은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